다시 거론되는 리비아 해법…카다피는 끝까지 핵물질 숨겼다
다시 거론되는 리비아 해법…카다피는 끝까지 핵물질 숨겼다
  • 아틀라스
  • 승인 2019.03.3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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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미국에 가져간 리비아 핵 직접 확인…“북한 핵 최종단계, 오크리지로 옮기는 것”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은에게 북한의 핵무기와 핵폭탄 연료를 미국에 넘길 것(transfer)을 요구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정은에게 건넨 문서에 이 같은 요구가 담겨있었다고 전했다.

로이터가 단독 입수한 문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북한 핵시설과 화학·생물전 프로그램, 탄도미사일, 발사대, 관련 시설의 완전한 해체'를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핵 프로그램에 대한 포괄적 신고, 미국과 국제 사찰단에 대한 완전한 접근 허용, 모든 관련 활동 및 새 시설물 건축 중지, 모든 핵 인프라 제거, 모든 핵 프로그램 과학자 및 기술자들의 상업적 활동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의 이같은 요구가 업무오찬이 돌연 취소된 이유이며, 이 문서가 회담 결렬 이유라고 로이터는 전했다.

북한의 핵무기를 미국 영토로 넘기라는 것은 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지난 2004년 북한 비핵화 해법으로 처음 제안한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리비아식 비핵화 해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해왔다.

 

그러면 리비아 해법 또는 리비아 방식은 무엇이며, 리비아의 핵 폐기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리비아 방식의 헥 폐기는 완전한 핵 포기를 선언하고 검증이 이뤄진 후에 경제제재 해제 등의 보상을 받는, 선폐기-후보상의 방식을 말한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런 용단을 내렸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다.

하지만 카다피는 2011년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핵물질을 숨겨둔 사실이 후에 드러났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 일부의 대량살상무기는 폐기했지만, 최후까지 일부는 숨겨두고 서방세계와 협상을 벌였다. 카다피의 경우를 보면, 김정은이 마지 못해 리비아 모델을 따른다 하더라도, 북한 어딘가에 핵무기를 숨겨두고 흥정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리비아 핵무기 무장해제의 과정을 살펴보자.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무아마르 카디피 전 국가수반 /위키피디아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무아마르 카디피 전 국가수반 /위키피디아

 

 

김정은과 같은 나이에 집권해 핵무기 도입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Qaddafi)1969927일 김정은 집권 때와 같은 나이인 27세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쿠데타에 성공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반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골격으로 아랍 단일국가 건설을 주창했다.

리바아는 카다피의 쿠데타에 앞서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지만, 카다피의 쿠데타로 미뤄지다가 1975년 이 조약을 비준한다.

카다피의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화학무기와 핵무기등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가지고 있어야 미국과 유럽에 대항하고 이스라엘을 추방하고 아랍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라 믿었다.

그는 집권하자 바로 WMD 확보에 나섰다. 1970년대초 그는 해외 암시장에서 핵무기를 구입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카다피 정권에 대해 테러지원국이라고 비난하면서 경제제재를 단행했다. 1986년 카다피는 미국 팬암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켜 270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미국을 넘어 유엔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카다피의 거처가 확인되면 즉각 폭격에 들어가 카다피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은채 유랑생활을 했다. 동시에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 확보에 더욱더 열을 올렸다.

 

미국의 압박에 핵 폐기 비밀협상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체재가 와해되자 카다피는 기댈 곳이 없어졌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리비아와 핵폐기 협상을 벌였던 마틴 인디크(Martin Sean Indyk)의 회고록에 따르면, 카다피는 빌 클린턴 행정부가 시작되는 1990년대초에 반미 노선과 범아랍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99년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겠다는 조건을 미국에 제의해 비밀협상을 벌였다.

곧이어 미국에 조지 W. 부시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피 정권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압델 라만 샬감(Abdel Rahman Shalgham)의 증언에 따르면 카다피가 같은 제안을 부시 정부에 제의했는데, 부시 대통령의 답변은 당신이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미국이 아무런 협의 없이 파괴하겠다는 것이었다. 부시의 이 발언이 카다피로 하여금 핵 폐기로 돌아서게 했다고 샬감은 증언했다.

카다피는 외교관들을 파견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만나 핵폐기 의사를 타진해 긍정적 대답을 얻은후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들통난 이중플레이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참사가 발생하자, 카다피는 알카에다를 비난하며 미국을 지지했다. 곧이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알카에다를 토벌할 때, 카다피는 알카에다 잔당의 수색에 협조하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노력했다.

그러던 중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200310월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지중해에서 리비아로 향하는 화물선을 나포했는데, 배 안에는 핵연료 원심분리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CIA 조사에서 이 부품들은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압둘 칸(Abdul Qadeer Khan) 박사와 다국적 핵기술자들의 지도를 받아 말레이시아 스코미 엔지니어링이란 회사에서 만든 제품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카다피는 한쪽에선 핵 폐기 협상을 벌이고, 다른 한편에선 핵물질과 부품을 사들이는 이중플레이를 더 이상 할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핵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마침내 핵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2004년 미국이 리비아의 핵물질을 가져가 보관한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위키피디아
2004년 미국이 리비아의 핵물질을 가져가 보관한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위키피디아

 

 

핵 폐기 선언에서 폐기까지 한달 걸려

20031219일 카다피는 전격적으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생화학무기와 핵무기를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리비아 외교부는 그동안 많은 암거래 시장에서 핵 물질과 부품을 수입해왔다고 시인하고, 모든 핵 원심분리장치를 미국 관리에게 이양하고 그동안의 공급자 명단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리비아 핵 기술 제공자 명단에는 파키스탄의 칸 박사와 여러 과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20041월 미국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인터폴의 협조를 얻어 리비아의 핵 개발 총책과 칸 박사를 도운 스위스 과학자 프리드리히 티너(Friedrich Tinner)를 체포했다.

2004124일 미군 수송기가 리비아에 도착해 핵 기술과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25,000톤 분량의 서류와 장비를 싣고 미국 테네시에 있는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가져갔다.

카다피의 핵 폐기 선언에서 미국의 철거까지 한달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카디피의 결단을 환영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미 국무부 폴라 드써터 차관보는 리비아의 핵 폐기가 다른 나라의 모델이 되도록 교훈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들은 리비아 빙식을 이란과 북한, 시리아에 적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다피도 서방 국가들이 자신에게 이란과 북한에 핵 폐기를 조언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리비아는 국제사회로 나오게 되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되기도 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Saif al-Islam Gaddafi)미국이 핵 포기의 대가로 안전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장차 미국과 군사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잔여물질로 협상 시도한 카다피

하지만 아랍권에서는 카다피의 결정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리비아의 핵 포기로 인해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핵 주도권이 강화되었고, 미국의 선제적 공격의 정당성만 입증시켰다는 것이다.

카다피는 핵을 포기한 이후 서방세계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댓가를 바랐는데, 돌아온 것은 기대 이하였다. 게다가 미국과의 외교관계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미국은 남은 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압박했다.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지원, 외교관계 개선이 늦어지자 카다피는 불만을 터트렸다.

2009년 카다피는 이미 약속한 농축우랴늄의 선적을 회피했다. 다시 미국과 카다피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2010년말부터 불기 시작한 자스민 혁명, 즉 아랍권 민주화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닥쳐왔다. 리비아 국민들도 카다피의 독재에 항거했다. 시위는 초기에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었지만, 순식간에 불이 붙으면서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카다피는 공군을 동원해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20113월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수시로 리비아를 공습해 반군 시위대를 지원했다. 유엔군의 공격에 이어 반군이 트리폴리를 압박했다.

 

숨겨둔 핵 물질 발각돼

카다피는 자발적 핵무기 폐기의 조건으로 체제를 보장한다고 했으니, 미국과 유럽에 공습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빠지자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와 지지자들은 핵 포기를 후회한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서방의 리비아 공습은 계속되었고,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키고 반군의 승리로 귀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다피는 201110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았다. 42년 권좌의 끝은 죽음이었다.

당시 아랍권 언론에서는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공습을 목격한 북한과 이란 등 핵보유 희망국들이 핵을 포기할 경우 권력이 약화된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핵 프로그램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반군이 사바(Sabha)라는 지역을 점령해서 창고를 열어보았더니, ‘방사능’(radioactive)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수천개의 푸른색 통이 나왔고, IAEA는 그것이 옐로 케이크(yellow cake, 우라늄 제련에서 생성되는 중간생산물)임을 확인했다. IAEA는 나중에 이를 회수했다.

카다피가 제거된 후 리비아의 신정부는 2013800톤의 화학무기 원료를 폐기하고, 20142월 나머지 화학무기를 폐기할 것임을 선언했다. 2016년에야 완전한 화학무기 폐기가 이뤄졌다.

 

2004년 7월 12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테네시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를 방문해 리비아에서 수송해온 핵 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2004년 7월 12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테네시주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를 방문해 리비아에서 수송해온 핵 장비를 둘러보고 있다.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오크리지 연구소는?

2004712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네시주에 있는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를 방문했다. 그는 리비아에서 수송해온 핵 장비를 손수 둘러 본 후 35분간의 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은 9·11 테러를 잊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 그것(9·11 테러)을 잊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 직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로 규정했었다.

이날 부시 대통령이 둘러본 것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국가수반이 핵 폐기를 약속하고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수송한 핵무기였다.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군사공격을 받느냐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카다피는 핵 폐기를 선택한 것이다.

리비아가 폐기하기로 약속한 핵물질의 최종 종착지는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였다.

20031219일 리비아의 카다피는 전격적으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생화학무기와 핵무기를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있고 한달 후인 2004124일 미군 수송기가 리비아에 도착해 핵 기술과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25,000톤 분량의 서류와 장비를 싣고 미국 테네시에 있는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가져갔다.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는 미국 에너지부(DOE: U.S. Department of Energy)가 후원하고 비영리회사인 UT-Battelle이 관리·운영하는 미국 국가 과학기술 연구소이다.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위치하며, 총면적은 150로 서울의 4분의1, 실험실만 여의도 6배인 18를 차지하는 대형연구소다.

오크리지는 1942년 미국이 2차대전 중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원자폭탄을 실험하기 위해 미국 연방정부가 테네시주로부터 땅을 얻어 설립한 타운이다. 1943년 클린턴 연구소가 완공돼 농축우랴늄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이 클린턴 연구소가 나중에 확대 개편되면서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되었다.

2012년 현재 이 연구소에 근무하는 직원은 4,400 명이며, 그 중 1,600명이 직접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연평균 3,000 명의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간 예산은 165,000만 달러(17,000억원 상당)이며, 이중 80%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나머지는 다양한 곳에서 지원받는다.

연구의 목적은 미국의 국가 안보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연구 분야는 핵물리학, 에너지, 고성능 컴퓨팅, 생물학 등 다양하며, 세계 최고의 슈퍼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리비아에서 수송한 핵무기를 제거 또는 폐기하는 작업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구소련 해체후 카자흐스탄의 비핵화를 진행했다. 당시 오크리지 연구소의 핵 전문가가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하고, 곧이어 관련 장비를 항공기에 싣고 오크리지로 옮겨갔다.

 

카다피는 핵 폐기 때문에 몰락했을까.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지난해 자신의 명의로 낸 담화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볼턴을 비롯한 백악관과 국무성의 고위관리들은 선 핵포기, 후 보상방식을 내돌리면서 그 무슨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니,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수 없는 비핵화, ‘·미사일·생화학무기의 완전폐기니 하는 주장들을 꺼리낌없이 쏟아내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이어 세계는 우리나라가 처참한 말로를 걸은 리비아나 이라크가 아니라는데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핵개발의 초기단계에 있었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김계관의 담화는 핵을 포기한 후 리비아의 카다피가 최후를 맞았던 전례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이며, 역으로 기존에 보유한 핵은 유지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 김계관이 구체적으로 거론한 리비아 방식의 핵 포기는 무엇이고, 리비아 최고통치자 카디피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카다피 정권이 몰락한 것은 민주화운동 때문이다. 2010년말부터 불기 시작한 자스민 혁명, 즉 아랍권 민주화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닥쳐왔다. 리비아 국민들도 카다피의 독재에 항거했다. 시위는 초기에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었지만, 순식간에 불이 붙으면서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카다피는 공군을 동원해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가 20113월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수시로 리비아를 공습해 반군 시위대를 지원했다. 유엔군의 공격에 이어 반군이 트리폴리를 압박했다.

카다피는 자발적 핵무기 폐기의 조건으로 체제를 보장한다고 했으니, 미국과 유럽에 공습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서방은 카다피의 핵 폐기와 인권탄압은 별개의 것이라며, 공습은 계속했다. 카다피는 201110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았다. 42년 권좌의 끝은 죽음이었다.

카다피 정권은 핵 포기 때문이 아니라 독재 때문에 무너졌고, 미국이 아니라 자국 국민들에 의해 종식된 것이다. 북한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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