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러시아 파산②…150%의 살인적 금리
1998 러시아 파산②…150%의 살인적 금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9.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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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대응의 실패…해외자본 빠져 나가자 중앙은행, 파격적 금리인상

 

1998년초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러시아의 체르노미르딘 총리를 방문해 회담을 가졌다. 양국의 차기 대권주자들은 별 영양가는 없지만 21세기를 논하고 세계 질서를 걱정했다. 그들은 언론 보도용으로 사진도 멋들어지게 찍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오랜 와병에 시달려온 노정객 옐친의 눈에는 체르노미르딘의 행동이 반역에 가깝게 보였다. 자신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두 사람이 자신을 제껴놓고 다음 정권을 의논하고, 세계 평화를 의논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병들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특히 아랫사람들의 행동거지에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 그래서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2인자는 서럽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옐친으로선 60세의 총리가 밉기만 했다.

옐친은 경제 위기를 탈출한다는 명목으로 6년 동안 러시아 경제 개혁을 추진해온 체르노미르딘과 그의 각료들을 해임했다. 그리고 35세의 젊은 키리옌코를 2인자 자리에 앉혔다. 젊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구세력이 가만있질 않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처럼 선거직이면 젊은 것이 그 나라의 힘이 될 수 있으나, 임명직을 젊은 사람으로 쓰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의회를 장악한 공산당은 키리옌코 인준을 반대했다. 키리옌코는 총리 인준에 몇 달을 허비한 후 4월에야 간신히 정식 총리에 올랐다.

최대 정치쟁점이었던 총리 인준이 해결되자, 러시아 주식시장은 상승했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젊은 총리가 경제개혁을 과감히 단행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서방 자본도 러시아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키리옌코가 겨우 내각을 구성하자, 진정될 줄 알았던 아시아 위기가 재연,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있었고,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도 금리 인상설을 흘렸다. 자본은 금리가 높은 쪽으로 움직인다. 국제 자본은 속성상 불안한 이머징 마켓보다는 금리가 높고 안정성이 있는 선진국을 선호한다. 러시아에 투자된 서방의 자본이 움찔했다. 엇비슷한 시기에 한국 금융기관에 대한 신인도가 하락하고, 인도네시아 정정이 일촉즉발로 위태롭게 전개됐다. 일본 엔화는 바닥을 모른 채 떨어졌다. 중국도 위안화를 절하하겠다고 나왔다.

불에 덴 사람은 솥뚜껑만 보아도 무서워한다. 한해전에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 이머징 마켓에서 손해를 본 국제 투자자들은 새로운 이머징 마켓으로 부상하는 러시아도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차하면 빠져나올 태세로 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러시아 주가도 동시에 하락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브리태니카 백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브리태니카 백과

 

19985월 러시아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연이어 국제금융시장에 전달됐다.

그 무렵 세르게이 두비닌(Sergei Dubinin) 중앙은행 총재가 3년 내에 외채 위기가 올 것이라고 정부에 완곡하게 경고했다. 어느 나라 중앙은행이나 정부에 대해 통화정책과 금융정책을 경고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 정부 기관 간에 오가는 문서였는데, 러시아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해 버렸다. 언론 보도가 때론 국제 금융시장을 자극한다. 이 정보가 국제 시장에 알려지자, 외국 투자자들은 러시아 외채가 심각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며칠후 옐친 대통령이 국영 전력회사에 대한 외국인 지분 참여를 제한하는 법률에 서명해야 했다. 의회가 지나치게 몰아부쳤기 때문에 옐친이 마지 못해 승인한 것이었지만, 외국 투자자들을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러시아 주가가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두비닌 중앙은행 총재가 금융정책을 발표하자, 외국 투자자들이 이를 루블화 절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버렸다. 이런 실수와 오해가 반복되면서 러시아에 투자했던 외국인들이 서서히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키리옌코 총리가 직후 경제 정책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경제 실정을 너무나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그는 우리는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솔직하게 가난하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회 인준을 받은지 2주밖에 안된 젊은 총리는 러시아 경제의 근본적인 병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입을 늘려 예산적자폭을 줄이겠음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설득을 구하려 했던 것인데, 그의 말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오해의 소지를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탈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러시아는 국제 금융시장을 상대로 PR을 하는 방법을 몰랐다. 해외 투자자들은 러시아가 곧 무너지는 것으로 인식했다.

 

19985월 중순 모스크바 당국은 IMF와 협상에 들어갔다. IMF1999년까지 3년 동안 지원하기로 한 100억 달러중 이미 52억 달러가 지불됐다. IMF는 분기별로 할당금을 지원하면서 매번 협상을 벌였다. IMF는 그 동안 약속한 것이 얼마나 지켜졌고, 상황 변화에 따라 새로운 수정을 제시하며 피지원국을 괴롭히는 관행이 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그냥 줄리 없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번에 배짱을 부렸다. 10년 전만 해도 세계의 절반을 휘어잡던 대국이 미국의 위성 기구나 다름없는 IMF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7억 달러의 분기 지원금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IMF는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해 1998년도 세입을 3,150억 루블(520억 달러)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측은 2,900억 루블(480억 달러) 늘리겠다고 나왔다. 숫자상으로 40억 달러의 견해차가 있었지만, 협상 초기에는 그럴수도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IMF는 그동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러시아측은 이번만은 IMF를 이기고 싶어했다. 러시아 정부는 IMF 처방이 때때로 틀리다고 생각했고, 아시아에서도 IMF에 대한 비판이 많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특히 IMF가 소련의 연방으로 있다가 독립한 나라에도 러시아 루블화를 통용하라고 한 요구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옐친 정부는 그 동안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올릴대로 올렸기 때문에 추가적인 세수 확대 법안이 공산당이 장악한 의회를 통과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IMF는 러시아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채권자로서의 입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양측의 협상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전개됐다.

 

때마침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미국 재무부의 서머스 부장관이 러시아에 왔다. 키리옌코 총리를 만나자고 했는데, 비서가 퇴짜를 놓았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비서는 러시아가 과거 공산주의 종주국일 때의 생각만 했던 것이다. 미국 재무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그는 몰랐다. 세계 지배의 중심 축이 펜타곤에서 미국 재무부로 바뀐 사실을 러시아 시골뜨기가 알 리 없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서머스와 키리옌코의 면담이 불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러시아를 탈출하는 엑소더스 현상이 벌어졌다. 월요일인 18일 중앙은행은 시중금리를 30%에서 50%로 인상하고, 이틀에 걸쳐 10억 달러의 보유 외환을 풀었다.

러시아 경제는 위기로 치닫고 있었지만, IMF는 결국 러시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IMF 협상단은 협상에 더 이상 진전이 러시아를 떠나버렸다. 남아있던 외국인 투자자들도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527, 러시아 국채 금리는 마지노선인 50%를 넘어설 조짐을 보였다. 이틀후인 27,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됐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했으나, 사는 사람이 없었다. 1년에 50%의 금리를 보장받는 고수익 상품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러시아 경제가 곧 부도가 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앙은행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위기 수습방안을 논의했다. 이사들 사이에 몇 가지 의견이 제시됐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파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런데 한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이사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는 법률 담당 이사였는데, 중앙은행에서 그리 중요한 직책은 아니었다.

그는 불쑥 50%인 은행 단기금리를 150%3배 올리자고 제안했다.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곧바로 금리를 3배 올리기로 했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금리가 두자리 수인 10%에 이르면 위험한 수준이다. 금리 150%1만 달러를 투자하면 1년후에 원금을 합쳐 25,000 달러를 보장한다는 의미다. 외국 자본을 모시기 위해 러시아는 이런 극단적 조치를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옐친은 제국주의자와 부르죠아들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고혈을 팔아야 했다.

러시아는 미국 재무부의 힘을 인정해야 했다. 키리옌코 총리는 아나톨리 츄바이스(Anatoly Chuais)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냈다. 서머스 재무부 부장관이 모스크바를 찾아왔을 때 만나주지도 않던 키리옌코는 사절단을 서머스의 집으로 보내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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