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문명] 나일강 수위에 운명 바뀐 고대 이집트
[물과 문명] 나일강 수위에 운명 바뀐 고대 이집트
  • 아틀라스
  • 승인 2019.03.3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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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잘 관리하던 때엔 번영…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몰락

 

고대 4대 문명의 공통점은 강 주변의 반건조 환경에서 관계농업으로 발전, 성장했다는 점이다. 예측할수 없는 강물의 범람을 예측하고 관리하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나일강의 이집트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하강 중류의 황하문명이 그것이다.

차이점이 있지만 이 4대 문명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전제군저죽 통치를 했다. 모든 권력은 물의 관리를 통해 형성되었고, 물의 관리는 경제 생산의 최고요소이며, 민중들의 노동을 강제했다.

집중화된 권력을 통해 노동력을 동원하고 수리사업을 통해 물이 가져다 주는 재앙을 막는 동시에 필요한 곳에 적절한 물을 공급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물 관련 시설을 만들었다. 관개시설, 배수용 운하, 수문, 물 저장 댐, 보호용 도랑, 제방들이 그런 시설들이다.

 

고이집트의 농사짓는 모습 /위키피디아
고이집트의 농사짓는 모습 /위키피디아

 

 

수리 문명의 대표는 고대 이집트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그러나 강의 수량은 적다. 나일강 수량은 아마존강의 2%에 불과하고, 콩고강의 12%, 양쯔강의 15%, 미시시피강의 30%, 도나우, 인더스, 컬럼비아강(미국)70%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막지대다. 나일강은 이 건조한 대지에 물을 공급했고, 상류에서 실어나른 흙을 침전시켜 옥토층을 형성해 주었다. 나일 강은 또 배의 양방향 운행이 가능하게 했다. 하류로 갈 때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고, 상류로 갈 때에는 항시 상류쪽으로 부는 바람을 받아 운항할수 있었다.

나일강은 청나일과 백나일로 나뉜다. 청나일은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해 깊은 협곡을 지난다. 백나일은 탄자니키, 빅토리아호에서 시작해 수단을 거치는데, 수단에서 절반 가량 증발해 이집트로 흘러들어간다.

이집트 나일강 주변에는 3m 높이의 자연제방이 형성되고, 제방 너머에 농사를 짓는 저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 면적은 현재의 스위스보다 좁다. 농부들은 이 곳에 나일강의 물과 토사를 끌어들여 밀과 보리를 재배했다.

 

고대 이집트 고분에서 나온 벽화. 농사 짓는 모습. /위키피디아
고대 이집트 고분에서 나온 벽화. 농사 짓는 모습. /위키피디아

 

 

나일강은 파라오의 통제를 넘어 예측불가능한 홍수와 가뭄을 일으켰다. 홍수는 마을을 잠기게 하고 경지를 쓸어가 버렸다. 극심한 가뭄은 수면을 낮추어 대기근을 일으켰다.

이집트의 흥망성쇠는 나일강의 변덕스러운 홍수와 가뭄에 의해 이뤄졌다. 자연이 혜택을 가져다주었을 때 고대 이집트는 번성했고, 자연이 불행을 가져 오면 쇠락했다. 나일강이 풍부한 물을 공급할 때는 식량이 남아 돌았고, 그 잉여식량은 상이집트와 늪지삼각주의 하이집트의 통합을 이루게 했다. 거대한 신전과 기념물, 왕조의 회복은 나일강 물이 풍부했을 때의 꽃피운 문명을 대변한다. 하지만 가뭄이 계속되어 나일강 수위가 바닥을 드러내면 결핍과 분열, 왕조의 몰락을 가져다 주었다.

고대 이집트 지배자들의 운명은 나일강의 수위계의 기록과 일치한다. 나일강의 리듬이 식량생산, 인구규모, 왕조의 범위를 좌우한 것이다.

 

이집트 역사는 고왕국(BC 3150~2200), 중왕국(BC 2040~1674), 신왕국(BC 1552~1069)으로 구분된다.

나일강은 아스완의 제1폭포 상류의 상이집트와 하류 삼각지대의 하이집트로 나눠진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처음 통합한 왕은 메네스(전갈왕)이다. 그는 상이집트의 지배자였다가 하이집트의 삼각주를 정복해 삼각주 머리부분인 멤피스에 수도를 정했다.

메네스는 관개사업과 동일시되는 파라오였고, 파라오의 임무는 나일강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메네스의 철퇴(1897년 발굴)에는 흰 왕관을 쓰고 킬트를 두르고 황소 꼬리가 달린 허리띠를 차고 관개용 운하 건설을 위해 괭이와 땅을 파면, 옆 사람이 그 흙을 바구니에 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이집트의 파라오는 토지 소유주이자 강을 통제하는 군주이며, 그를 보자하는 사제, 관리자등 엘리트는 제방감시관, 운하사업 관리자, 나일강 수위 감시인등의 직책을 맡았다.

초기 이집트의 석조댐은 높이 15mBC 2900년에 수도 멤피스를 홍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지어졌다. 카이로 남쪽에 BC 2950~27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높이 11m, 길이 80m의 저수지 흔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집트는 강우를 예측하고 농업시기를 예측하기 위해 달력을 만들었고, 땅을 측량하는 도구와 나일 삼각주의 갈대로 파피루스 기록을 남겼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왕국은 BC 2270년 이후 쇠퇴했는데, 지방영주들 간 투쟁, 도적떼 창궐, 대기근이 나타났다. 이는 지중해 지역이 건조해지던 시기와 일치하며, 나일강 수위가 낮아진 결과였다고 물의 세계사저자 스티븐 솔로몬의 분석이다.

고왕국이 멸망하고 200년간 이집트 각지의 영주들 사이에 혈투가 벌어진 암흑기가 도래했다.

다시 나일강의 수량이 풍부해지면서 BC 2040년 경에 상이집트 테베의 지도자가 이집트를 통일해 중왕국을 건설한다. 이 시기에 유대의 야곱가문이 가뭄과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집트 델타지역으로 이사간다는 내용이 성경에 나온다.

중이집트는 힉소스라는 아시아계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된다. 외적이 침략했을떼 이집트엔 가뭄이 닥쳐와 파라오의 대응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힉소스는 삼각주 지역을 장악하고 이집트에 충격을 주었다.

 

고대 이집트 최대영역 (BC 15세기) /위키피디아
고대 이집트 최대영역 (BC 15세기) /위키피디아

 

 

힉소스를 축출하고 신왕국이 이집트를 다시 통일했다. 이때 이집트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레반트 지역과 누비아 지역을 정복하고, 룰소르와 카르나크(테베)의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다. 3세기에 걸친 신왕국의 르네상스 시기에 나일강의 수위가 적절했다.

신왕국시기인 BC 13세기말 세부류의 침략자들이 지중해를 통해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집트는 이들을 축출했다.

오랫동안 신왕국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던 나일강 범람의 주기적 쇠퇴는 결국 내부질서의 해체로 이어졌고, 그 사이에 이웃 지역에서 형성된 제국들이 팽창해 이집트를 침략했다. 신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는 4세기 동안에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비시니아인 등의 외부 종족의 지배를 받았다.

 

나일강 분수령 /위키피디아
나일강 분수령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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