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④…소아시아 내준 만지케르트 전투
동로마④…소아시아 내준 만지케르트 전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0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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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에게 패해 로마누스 4세 포로로 잡혀…유럽 십자군 운동의 계기

 

동로마제국 역대 황제 가운데 로마누스 4(Romanus IV Diogenes 재위 1068~1071)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동로마(비잔티움)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갖 수모를 당했다. 동서 로마가 분열되기 전이었던 서기 260년 로마제국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샤푸르왕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아울러 제국군은 황제를 배신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군대라는 오명도 뒤집어 썼다.

 

로마누스 4세에게 치명타를 안긴 종족은 셀주크 투르크(Seljuk Tu) 족이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突厥) 족의 일파로, 당나라에 밀려 중앙아시아로 건너왔으며, 그곳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셀주크는 이란으로 내려와 왕국을 건설한 후 104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중동지역을 장악했다. 이제 그들은 소아시아 아나톨리아반도를 엿보았고, 동로마와 접경을 이루며 충돌했다.

때는 1971826, 터키 동부 만지케르트(Manzikert)라는 곳에서 동로마 군대와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 병력수는 쌍방 모두 2~3만명으로 비슷했다. 처음에는 동로마 군대가 7만명을 헤아리며 압도적이었지만, 우즈족을 비롯해 용병으로 참여한 다른 부족군들이 이탈하거나 셀주크에 투항해버리는 바람에 병력의 숫자는 비슷해졌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로마군대는 셀주크 적을 향해 진군했다. 유목민의 셀주크군은 정예 동로마군의 진격에 천천히 퇴각했다. 적들은 도망치면서 화살을 쏘아 진격속도를 늦추는 일만 할 뿐 방향을 돌려 공격하지 않았다.

 

만지케르트 전투시, 양군 이동로 /위키피디아
만지케르트 전투시, 양군 이동로 /위키피디아

 

하루종일 동로마군대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셀주크군은 퇴각했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군대를 지휘한 로마누스 황제는 아뿔사, 이게 저들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대에서 너무 멀리 온 것이다. 후방도 위험했다.

알프 아이슬란 /위키피디아
알프 아이슬란 /위키피디아

 

적장은 술탄 아르슬란(Alp Arslan)이었다. 그는 106330대초반의 나이에 술탄이 되어 중동 전역을 누비며 전투를 했고, 동로마와 접해 있는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은 백전노장이었다. 술탄은 동로마 영내인 카파도키아 일대를 여러차례 공격해 쑥대밭을 만든 이력이 있었다.

로마누스 4세는 술탄 아르슬란을 한낱 야만족 족장으로 얕잡아 보았고, 셀주크 투르크군을 떠돌이 유목집단의 오합지졸로 보았다. 하지만 적들은 숱한 전투를 하며 단련되었고, 유목민 본연의 동물적 촉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슬란은 멀리 높은 언덕에서 동로마군이 진격하고 자신의 군대가 천천히 퇴각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마누스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전진을 중단시키고 퇴각을 명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멀리서 아이슬란이 나타나 공격 명령을 내렸다.

역전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동로마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용병부대는 일찌감치 달아났고, 동로마군은 황제를 내버려두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셀주크군은 무너진 대오를 분리시켜 압박해 들어갔다.

황제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무도 자신을 돌보아주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일부가 황제를 발견하고 달려들었지만 셀주크군이 나타나자 달아났다. 현장을 목격한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공포감이 먼지 구름과 함께 밀려들면서 수많은 투르크 병사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 제국군 전체가 도망치고, 황제는 무방비 상태에 있고, 로마군 진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만지케르트 전투도(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위키피디아
만지케르트 전투도(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위키피디아

 

로마누스 4세는 도망치지 않았다. 멍하니 도망치는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말은 칼에 맞아 죽었고, 손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포로로 잡혔다. 적들은 그를 특별 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밤새도록 황제는 죽어가는 부상자들 속에 그대로 버려졌다.

이튿날 아침, 로마누스는 일반병사와 같은 차림으로 쇠사슬에 묶인채 술탄 앞에 끌려갔다. 술탄 아르슬란은 자기발 앞에 엎드린 이 초췌한 포로를 로마제국의 황제라 믿지 않았다. 다른 포로들이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서야 아르슬란은 그가 황제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술탄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누스에게 땅바닥에 입을 맞추라고 명하고, 그의 목 위에 발을 올려 놓았다. 투르크족이 승리를 자축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두 군주는 유명한 대화를 나누었다.

알프 아르슬란 : “만약 내가 당신 앞에 포로로서 보내졌으면 어떻게 하시겠소?”

로마누스 : “아마 당신을 죽이고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내걸었을 것이오.”

알프 아르슬란 : “내 처분은 더 무겁소.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해방시키겠소

그리고는 황제의 몸을 일으켜 세워 예를 갖추겠다고 약속했다. 술탄은 1주일 동안 그와 함게 식사를 하며 정중하게 손님대우를 했다. 이슬람식 기사도를 보인 것이다.

포로 황제와 승리의 술탄 사이에 협상이 오갔다.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안티오키아, 에데사 등의 점령지를 요구하고, 황제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몸값도 처음에는 1천개 금덩이를 불렀다가 로마누스가 제국의 국고기 비었다고 하니까 150개로 낮춰 주었다. 패자에게는 비교적 온건하거 관대한 처분이었다. 굳이어 아이슬란은 로마누스를 풀어주었다.

 

알프 아이슬란과 포로로 잡힌 로마누스 4세 /위키피디아
알프 아이슬란과 포로로 잡힌 로마누스 4세 /위키피디아

 

하지만 동로마제국은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요하네스 두카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요하네스는 돌아오는 로마누스를 황제로 인정할수 없었다. 굴욕스럽게 패전했다는 것이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요하네스는 부하들을 보내 로마누스의 항복을 요구했다. 로마누스는 저항하지 않았다. 황제직을 박탈당한 로마누스는 작은 노새에 태워져 800km를 행진하는 벌이 주어졌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초라한 짐승의 등에 썩어가는 시체처럼 실려가는 도중에 그의 눈은 뽑혀버렸고, 얼굴과 머리에는 온통 구더기로 들끓었다. 그렇게 그는 며칠동안 고통과 악취 속에 신음하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투르크족 진출지 /위키피디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투르크족 진출지 /위키피디아

 

만지케르트 전투는 동로마제국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이 전투 이후 투르크족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로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그곳에 옛 로마의 땅이라는 의미로 룸(Rum) 술탄국으로 이름지었다. 동로마 영토는 아시아쪽 아나톨리아 고원을 빼앗기고 소아시아 서부해안과 유럽쪽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의 절반을 잃었고, 곡창지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동로마는 더 이상 제국이라 불릴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안티오키아도 빼앗겨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도 차단되었다.

이 전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도 충격을 주었다. 109511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제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만지케르트 전투도 /위키피디아
만지케르트 전투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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