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브라질②…정치혼란이 가져온 경제위기
1990년대 브라질②…정치혼란이 가져온 경제위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0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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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이스주, 중앙중부 부채 지불유예 선언…카르도수 헤알화 절하 승부수

 

브라질 경제는 1997년 하반기 아시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국제핫머니가 고평가된 헤알화를 공략하기 시작했고, 헤알화는 아시아 국가처럼 폭락할 우려가 높았다. 브라질 주가가 연일 떨어져 11월초엔 2주만에 40%나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중앙은행은 헤알화 방어를 위해 수십억 달러의 보유 외환을 풀었고, 외환보유액도 50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때 카르도수 정부는 아시아 국가들이 하지 못하는 극약처방을 채택했다. 중앙은행은 외국 자본의 이탈을 막기 위해 단기 금리를 하루아침에 두배(46%)나 올렸다. 기업들은 금리가 높다고 아우성을 쳤고, 수출확대를 위해서는 헤알화를 평가 절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과거의 종속이론가는 외국 자본의 이탈을 막기 위해 긴축정책을 고집했다.

 

카르도수는 인기를 위해 긴축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우선 정부 스스로가 모범을 보였다. 199811월 카르도수 행정부는 50여개 항목의 긴축조치를 발표했다. 공무원 수를 10% 줄이고, 공기업과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를 줄이며, 공무원의 봉급을 깎는 것 등이었다. 정부 스스로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180억 달러의 예산을 절감함으로써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금을 290억 달러나 늘려 부담을 늘림으로써 그 설득도 반감됐다.

자유주의자로 돌아선 카르도수는 수입 물자 가격을 떨어뜨려 물가를 잡고, 외국 자본을 유치, 국가 파산을 막았지만, 빈민층을 양산했다. 브라질의 경제연구단체인 IBGE의 조사에 따르면 상위 부유층 20%가 국가 전체 부의 60%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하위 20%2%밖에 소유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민층이 전체 국민의 4분의1에 이르렀다.

종속이론은 제국주의 자본에 의해 제3세계 인민들이 가난에 빠지게 되고, 이의 악순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라질은 종속 이론가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 여건이었다.

브라질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 색다른 것은 무토지 빈민의 문제다.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리아등 대도시 주변 빈 땅에는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려와 천막을 치고 살고 있다. 토지 주인들은 한번도 경작하지 않으면서도 땅을 점거한 빈민들을 쫓아냈다. 그들은 갱들을 시켜 주모자를 협박했다.

무토지 빈민들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다며 동물들도 땅에 살 권리가 있는데,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 땅에 사람이 살수 없다는 것은 생존권 박탈이라며 투쟁을 벌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거치면서 도시의 공장에서 쫓겨난 무토지 빈민들은 수백만명으로 불어났고, 헤알화 개혁과 함께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전국 279 , 138만 에이커의 땅이 이들 빈민들이 점거, 천막촌을 이루고 있다. 상파울루 주변의 실업율이 199010.2%에서 1998년초 16.3%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도시 외곽에 빈땅에 살며 브라질 경제의 방대한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종속이론에서 신자유이론(neo-liberalism)으로 변절한 카르도수의 경제는 좌파세력으로부터 국제 자본에 의해 경제 주권을 빼앗기고 빈부 격차를 확대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상파울루 외곽에는 미국의 투자회사와 렌터카회사,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들이 세운 대형 옥외 간판이 서있다. 그 밑에는 갈데 없는 빈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브라질의 정치인 이타마르 프랑코 /위키피디아
브라질의 정치인 이타마르 프랑코 /위키피디아

 

19991월 헤알화 절하와 함께 파국으로 치닫던 브라질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헤알화가 절하된지 몇 달후 기자가 현지를 방문했을 때 40%를 웃돌던 단기 금리는 20%로 떨어졌고, 빠져 나가기만 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다시 브라질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업률은 악화됐다. 연초 9%였던 전국 실업률은 상반기가 지나면서 8%로 껑충 뛰어 올랐고, 연말이면 9%에 이를 것이라고 현지 은행인들은 걱정했다. 상업 중심지인 상파울루의 실업률은 헤알화 절하당시에 17%였으나, 몇 달후 20%를 넘어섰다.

 

브라질 위기는 정치 위기에서 출발했다. 사건의 발단은 브라질 2위의 경제력을 보유한 미나스 제라이스 주가 1999년 새해 벽두에 중앙정부에 대해 90일간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 이타마르 프랑코(Itamar Franco) 주지사는 16중앙정부 부채 185억 헤알(150억 달러 상당)에 대해 상환을 3개월 유예한다고 선언, 페르디난도 엔리케 카르도수 대통령의 연방정부에 정면 도전했다.

프랑코 주지사는 카르도수 대통령에 앞서 1992~94년에 대통령을 지냈으며, 카르도수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다. 프랑코는 카르도수 정부에 늘상 불만을 품어왔다. 부하였던 카르도수가 자신을 밀어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업적인 헤알 개혁을 카르도수가 도용, 공치사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그는 정치재개를 위해 주지사에 출마, 당선돼 새해 1월 정식 취임하면서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보냈다. 카르도수와 프랑코의 정치적 갈등은 나라를 수렁에 빠뜨렸다.

 

두 정치인 사이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앙숙 관계였다.

프랑코는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상원의원으로 정치인으로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가 중앙무대에 나선 것은 1991년에 당시 페르디난도 콜로르 대통령이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부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콜로르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1년만에 하야하고, 인기 없던 프랑코가 대통령직에 물려받았다.

대통령에 오른 프랑코는 비판 여론을 의식, 1년만에 대통령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2년을 채웠으며,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도탄지경에 이르렀지만, 경제에는 무관심했다. 자신에게 여론의 화살이 돌아오면 장관을 갈아치웠다. 그거 재임한 2년만 동안에 43명의 장관이 교체됐다. 대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갈아치웠다. 언론과 신문 만평은 프랑코 대통령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좋은 소재감으로 삼았다. 속옷도 입지 않고 미녀 모델들과 춤을 추는 모습, 광대 차림으로 카니발에 참여한 행동등....

여론의 타깃이 되다보니 공보담당 장관이 죽을 지경이었다. 프랑코의 분노를 사 해임당한 루이사 에른디나 공보장관마저 프랑코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혹평을 했다. 이에 대한 프랑코의 대답인즉, “내가 저런 여자를 장관으로 지명했다니, 미친 것이 분명하군하며 껄걸 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쨋든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던 프랑코가 재임중 유일한 업적이라면 카르도수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카르도수는 이른바 헤알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의 호감을 샀다. 카르도수의 개혁 정책은 헤알화를 일단 안정시켰으며, 치솟던 물가의 고삐를 잡기 시작했다.

헤알 정책의 성공은 카르도수로 하여금 대통령에 당선되게 했다. 이때부터 프랑코는 칼을 갈았다. 그는 헤알 정책은 내가 했는데, 카르도수가 그 공을 다 차지했다. 카르도수는 내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며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1998년 그는 자신의 정당인 민주운동당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그 정당은 카르도수의 연임을 지지하며 후보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에서도 물을 먹은 프랑코는 고향인 미나스 제라이스로 돌아가 주지사에 당선됐고, 취임 첫날 카르도수에가 쌓이고 쌓였던 분풀이를 쏟아냈던 것이다.

프랑코의 폭탄 선언으로 타격을 받은 것은 카르도수에 그치질 않고 브라질 경제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해외투자가들은 보따리를 싸들고 브라질을 떠났다.

카르도수 대통령은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냈으니, 다름아닌 헤알화 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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