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발견’ 신안선에 생존자 있었을까
‘세기의 발견’ 신안선에 생존자 있었을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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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僧 다이치 선사, 영광군에 표착해 고려 국왕 알현…고려사, 일본 기록 일치

 

1975년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끌려 나왔다. 이를 계기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간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원대(元代) 도자기 2661, 금속제품 729, 돌제품 43, 동전류 28(8백만개), 자단목 1,017, 기타 574점 등 어마어마한 유물이 인양되었다.

이때 건져올린 신안선은 중국 원나라 무역선으로, ‘세기의 발견이라 불리며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국 수중발굴 첫 보물선이다. 수중 잔해물을 인양해 복원한 결과, 신안선은 길이 34m에 너비 6.6m, 260톤급 배로 추되었다. 이 배는 20m 바다 속에서 650년 동안 잠자다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의 연구로 중국 닝보(寧波)에서 출항해 일본 하카다(博多)와 교토(京都)의 토후쿠지(東福寺)로 운항하던 도중에 1323년에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동전에 달아두었던 물표인 묵서(墨書)의 표기로 확인된다.

 

신안선 조각을 붙여 놓은 모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신안선 조각을 붙여 놓은 모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그렇다면 우리 사서에 신안선과 관련한 기록이 있을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영광군 앞바다에 선박 표류 기록이 동시에 나온다. 두 사서는 충숙왕 11(1323) 7월조에 같은 내용을 동시에 실었다. 내용인즉, “계축(729) 왜구의 선박이 풍랑으로 영광군(靈光君)에 표류하였는데 모두 220여명이었다. 배를 마련하여 돌아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궁인창씨 페이스북 사진
궁인창씨 페이스북 사진

 

신안선이 침몰된 지점은 고려시대 행정구역으로 영광군에 속했다. 그렇다면 신안선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공히 나오는 왜구 표류선일까. 현재의 기록으로는 이를 부정할 대안이 없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신안선 침몰 시기를 13237(음력)로 본다.

 

또다른 의문은 고려사에 기록된 220명이나 되는 왜인 가운데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없을까, 하는 점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뛰어다닌 사람이 궁인창씨다.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그는 평소 역사 유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해양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요트로 신안 앞바다를 지나면서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승이 분명히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중국의 시안(西安) 항저우(杭州) 상하이(上海), 일본의 나카사키(長奇), 한국의 목포 신안 등지를 탐문조사했다.

그는 탐문조사 과정에서 일본에서 肥後國史料叢書에 다이치(大智, 12901366) 선사가 쓴 전기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이치 선사의 전기에는 1323년 고려 영광군 바다에서 배가 좌초되었다가 살아나 고려국왕 충숙왕을 알현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궁인창씨가 일본 다이치 선사 상 앞에서 찍은 사진 /생활문화아카데미 페이스북
궁인창씨가 일본 다이치 선사 상 앞에서 찍은 사진 /생활문화아카데미 페이스북

 

궁인창씨가 조사한 내용은 2017년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 제출한 신안선(新安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논문에 실려 있다.

다이치 선사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중이 되었고, ()나라에 가서 10여년을 머물면서 고승들에게서 두루 공부했다. 돌아올 때에 고려에서 난파했는데 살아서 귀국했고, 만년에 기쿠지(菊池)씨의 후원으로 히고국(肥後國) 다마나(玉名)에 광복사(廣福寺)를 짓고 수월암(水月庵)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이치 선사 좌상  /일본 이사카와현
다이치 선사 좌상 /일본 이사카와현

 

일본의 기록 大智禅師偈頌에 다이치 선사가 중국에서 출항해 일본으로 가다가 고려에 표류한 내용이 나온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이치가 귀국하는데 원() 황제 영종(5, 재위 1320~1323)이 불러서 자기네 나라 배를 타고 가라고 했다. 다이치가 불가의 법도에 따라 감사의 뜻을 표하고 배를 탔다. 닻을 올리고 출항한지 절반쯤 지났을 때 흑풍(黑風)을 만나 배가 흔들리고 돛이 기울어 배가 부서져서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고려에 표착했다. 다이치 선사가 탄 배는 고려 연안에서 난파한 뒤에 고려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충숙왕(忠肅王)을 알현하고, 배가 난파해 가련하게 되었음을 아뢰는 글(偈頌)을 올렸다. 그 글에서 다이치 선사는 무지하게 귀가하는 길을 잘못 들어 허무하게 아침을 맞게 되었다라는 구절을 올렸는데, 그 구절은 당시 상황이 절망적이었음을 알수 있다. 충숙왕은 애통하게 여겨 배를 보태 주었고, 충숙왕은 이듬해인 1324819일 많은 일본 표류민들을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다이치 선사도 그들과 함께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金澤)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이치 선사는 고려에 체류하면서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그는 방문하는 절에서 시 한소절씩 남겼다.

선사는 전남 하동 쌍계사(雙磎寺)를 들러 그곳 스님들과 사귀었고, 떠날 때에 천리 멀리 헤어져야 하니, 또다시 만나러 올 기약이 없구려라는 싯구를 남겼다. 강진 백련사(白蓮寺)에서도 시를 남겼고, 경상도 상주 대승사(大乘寺)를 방문해 인적과 멀리 떨어져 수행에 열중하는 승려들의 모습을 시로 읊었다. 여수 흥국사(興國寺) 뒷산에 올라 진달래 꽃을 보며 鷲尾看花라는 시를 남겼다. 그는 순창 송금암(松昑菴), 장흥 천관사(天冠寺)도 다녀갔다.

 

신안선이 침몰된 지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신안선이 침몰된 지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몇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다이지 선사의 기록에는 원나라 황제가 자국선을 태워 선사등을 일본으로 귀국시켰는데, 고려 기록에는 왜선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는 조선 세종 때, 고려사절요는 조선 문종 때에 간행되었는데, 그때에 왜 표류선의 국적이 와전된 것일까. 일본인 220명이 배를 탔다면 한척이 아니었을 터인데, 나머지 배는 어디로 갔을까. 중국배와 일본 배가 뒤석여 난파해 중국배는 침몰하고, 일본배만 표착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미스터리로 남는다.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로 남겨두자. 현재의 기록으로 볼 때 1323년에 일본승의 고승 다이치가 고려에 표착해 국왕을 접견하고 유명한 절을 두루 들렀다가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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