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브라질③…커지는 빈부격차
1990년대 브라질③…커지는 빈부격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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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절하로 월가와 대형은행 큰이익…시장 개방후 불안한 구조 노출

 

일국의 통화가치가 폭락하면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가난해진다. 달러로 표시되는 GDP1인당 국민 소득이 줄어든다. 그러나 모두가 패자는 것은 아니다. 이 와중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1991년 브라질 헤알화 절하의 승자는 월가 은행과 현지 대형은행들이었다. 패자는 전체 국민과 브라질 소형은행, 절대로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있던 기업들이었다.

미국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브라질 현지법인은 헤알화 절하가 단행된 19991월 한달동안 15,0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이 금액은 자그마치 한해전인 1998년 연간 이익의 두배에 해당한다. 뉴욕 월가의 대형은행인 JP 모건도 그해 1월 브라질에서 돈을 쓸어 담았다.

브라질에서 내로라는 투자은행인 방코 마트릭스도 헤알화 절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 은행은 누차에 걸친 정부의 다짐에도 불구, 평가 절하가 단행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돈을 달러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평가 절하 후 한달동안 수익이 한해전의 연간 수익을 4배나 됐다. 몇 년을 땀을 흘려 벌어야 할 돈을 정확한 선견지명으로 한달만에 보충한 것이다. 마트릭스 은행의 로베르토 루만 이사는 환율 정책이 변할 때 이익이 나는 방향쪽으로 기회를 포착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은 돈을 놓고 돈을 먹는 투전판이다. 은행이라고 다를바 없다. 은행은 다른 투기자보다 많은 정보와 판단력을 보유하고 있고, 또한 엄청난 판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두번 지더라도 상대방을 꺾을 수 있는 기회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자금력이 약한 중소 은행들은 대부분이 경제위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헤알화 절하 게임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방코 폰테 신담 은행은 정부를 신뢰하다 망한 케이스다. 이 은행은 절대로 헤알화가 절하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 헤알화를 달러로 환전하는등 헤지를 하지 않고 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파산직전에 몰린 이 은행은 얼마후 프랑스 은행에 팔려나갔다. 경제 위기는 가난한 국민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내몰지만, 월가 은행들과 브라질 대형은행들에겐 특수를 누리는 기회를 부여한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이 가중되고, 경제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글로벌 금융시장이 창출한 결과다.

 

그러면 대형 은행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브라질 좌파 정당은 정부가 평가 절하를 단행하기 이전에 몇몇 은행들에게 이 사실을 흘렸고, 은행들은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야당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었다. 금융계 동향을 잘 이해하는 뱅커라면 헤알화 절하가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가 은행과 브라질 은행들은 두가지 방법을 썼다. 첫 번째가 평가 절하에 대비, 달러로 전환해 두는 것이고, 둘째가 파생금융상품의 일종인 통화 선물 계약을 체결해두는 방법이다. 브라질 정부는 외채 상환을 위해 달러 표시 국채를 대거 발행했는데, 이 채권을 사둔 은행들은 헤알화가 절하되자 가만 앉아서 며칠만에 높은 수익을 얻었던 것이다.

브라질 은행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브라질 정부는 1990년대초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채권 발행을 통해 통화를 흡수했었다. 그 채권은 아주 높은 금리가 적용됐다. 은행들은 채권을 대거 매입함으로써 높은 이자 수익을 챙겼다.

금융은 제로섬 게임이다. 따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가 생긴다. 큰 돈을 번 사람이 있으면 잃는 쪽에선 손실이 커진다. 은행들이 경제 위기에서 큰 돈을 벌었지만, 브라질 국민들 대다수는 가난의 질곡에서 허덕여야 했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빈부 격차가 컸다. 정부 통계로 전국민중 상위 부유층 10%의 소득이 하위 빈민층 10%44배나 된다. 외국은행이든 현지 은행이든 투전판의 승자들은 코파카바나 해변의 노점상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것이다.

 

1990년대말 브라질을 금융위기에서 탈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중앙은행의 아르미니오 프라가(Arminio Fraga) 총재가 꼽힌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17,000만 인구의 브라질 중앙은행의 총수에 오른 그는 뉴욕 월가에서 펀드매니저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카르도수 대통령은 헤알화 절하 직후 구스타보 프랑코 총재를 경질, 프란시스코 로페스씨를 그 자리에 앉혔으나, 금융위기는 조금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카루도수 대통령은 3주만에 월가에서 사람을 데려왔으니, 그가 바로 프라가였다.

199933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한 프라가는 다음날 금리를 39%에서 45%로 올렸다. 어느 나라건 중앙은행 총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금리 인상이다. 그러나 프라가는 살인적인 금리를 무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발을 묶어두고, 환율 안정을 위해 어떤 수단을 쓸 수도 있다는 의지를 국제금융계에 확인시켰다. 그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브라질을 다시 찾아왔으며, 이에 힘입어 프라가는 수차례에 걸쳐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 있었다.

프라가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한후 브라질 중앙은행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금융수업을 받은 곳은 뉴욕 월가였다. 그는 월가 투자은행인 살로먼 브러더스를 거쳐 헤지펀드의 거장 조지 소로스 밑에서 펀드 매니저로 활약했다.

그는 중앙은행 총재를 맡은 후 미국과 유럽의 채권은행들을 찾아다녔다. 만기가 돌아와도 상환하지 못할 외채에 대해 자신을 믿고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좋았다. 선진국 은행들은 만기연장은 물론 신규 대출도 선뜻 내주었다. 한해전인 1998년초 선진국 채권은행들이 미국 재무부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한국의 외채 만기를 연장해준 것과 대조적이다. 월가 은행들은 프라가는 한 배를 탄 동지로 인식했고, 그도 역시 월가 사람들과 연이 닿고 있었다.

또 프라가는 중앙은행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태국과 한국 중앙은행이 환란을 겪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거울로 삼았다. 그는 조그마한 통계, 정책이라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고, 기자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답변했다. 그는 금융시장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국제금융시장의 동료들이 그에게 이것저것 항의하면 나도 얼마 전까지 당신 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이젠 나를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위키피디아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위키피디아

 

필자는 1999년에 리우데자네이루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코파카바나 해변에는 비키니 차림의 늘씬한 여인들이 해변을 따라 조깅을 즐겼고, 수백여m의 백사장 대로가 어둑어둑해지면서 노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악하게 가공한 보석류, 가난한 화가의 그림, 싼 웃가지들이 전등불 하나에 의지해 진열되어 있었다. 야시장의 노점상들은 하오 7시가 되면 하나 둘씩 나타나 자정까지 인근의 부유층과 관광객들을 기다렸다.

뉴욕에 살다가 귀국해 이곳에서 보석 진열대를 차려 놓은 70대 노인은 여기에 있는 노점상들은 사실상 실업자라며 뉴욕 월가는 수익만 내길 바라지 실업율 따위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세계 금융센터인 뉴욕 월가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실업 인구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젊은 시절에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이 노인네는 미국 은행들이 브라질에 빌려준 빚을 받아내기 위해 실업을 강요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브라질은 제3세계, 개발도상국, 이머징 마켓등으로 불리는 비()선진국 그룹의 대표적인 나라다. 1987년에 치욕적인 모라토리엄(국가 파산)을 선언했던 쓰라린 경험을 통해 브라질은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리즘에 편입했다. 그 결과는 리우와 상파울루의 고층빌딩, 그리고 대대적인 달러 유입이었다. 그러나 글로벌리즘은 세계 경제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도 동시에 흔들리는 불안한 구조를 노출했고, 국내 빈부 격차가 커지는 문제를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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