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석유시장에선 왜 배럴이란 단위를 쓰나
국제석유시장에선 왜 배럴이란 단위를 쓰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0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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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 오일붐 때 와인 술통에 원유 담아 쓰면서 생겨나…1972년 규격화

 

원유의 양을 재는 단위로 배럴(barrel)이 사용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얼마 올랐다는 기사를 흔히 접한다. 실제 주유소에서 사용하는 단위는 미터법을 기준으로 하는 리터다.

그러면 원유의 양을 측정하는 배럴이란 단위는 국제시장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오일러시가 시작되었다. 에드윈 드레이크(Edwin L. Drake)라는 석유개발자가 티터스빌(Titusville)이라는 마을의 산골짜기의 암석층을 뚤었는데, 지하 21m 지점에서 원유가 쏟아져 나왔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개발업자들이 몰려와 인근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 지역은 산악지대여서 수송이 문제였다. 원유를 용기에 담아 뗏목에 실어 엘레게니 강으로 수송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원유를 수송하는 파이프리인의 개념이 없었다. 개발업자들은 채굴된 원유를 아무 용기에나 담아 수송했다. 만만한 게 술통이었다. 나무조각을 엮어서 만든 술통은 영어로 배럴(barrel)이라 했다. 가장 많은 양의 원유를 실을 수 있었고, 대량을 제작가능한 용기였다.

 

1862년 펜실베이니아 오일 러시의 모습 /위키피디아
1862년 펜실베이니아 오일 러시의 모습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배럴의 기준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배럴을 구해와 원유를 채워 팔았다. 어떤 것은 위스키 배럴이고, 어떤 것은 와인 배럴이었다. 앞서 영국에서는 1483년 국왕 리처드 3(Richard III)가 술 종류에 따라 배럴의 단위를 정해 놓았다. 와인 배럴은 42갤런 짜리였고, 위스키는 40갤런 짜리가 통용되었다. 영국 식민지를 경험한 미국에서도 이 기준이 통용되었다.

그런데 수요자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배럴의 기준을 통일하라는 요구였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2~3갤런의 차이가 나는 배럴들에 원유가 수송되고 있었다. 수송하는데도 불편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쌓을 때 불균형이 생겼다.

1866년경 펜실베이니아의 석유개발업자들은 42갤런 짜리 와인 술통에 일괄해서 원유를 담아 주니, 구매자들이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간의 시행착오와 합의과정을 거쳐 1872년 사업자들은 원유개발업자들은 42갤런 와인 배럴을 기준으로 삼기로 합의했고, 미국 연방 지질국과 광산국도 1882년에 이 기준을 승인하게 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럴 /위키피디아
나무로 만들어진 배럴 /위키피디아

 

오늘날에는 채굴한 원유를 파이프라인으로 실어나른다. 게다가 강철 드럼(drum)이 만들어져 나무로 만든 배럴은 사용되지 않는다.

원유 이외의 천연액화가스나 화학물질 등은 미터법으로 부피나 무게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 석유시장에서 19세기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배럴이란 단위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국제원유시장에서 1배럴은 42갤런, 159리터다.

 

현대식 스테인레스 배럴 /위키피디아
현대식 스테인레스 배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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