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동신발 주인은 마한의 40대 여성 수장
나주 금동신발 주인은 마한의 40대 여성 수장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0.10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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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금동신발에 들어간 파리의 비밀 캐다…고대 영산강 일대는 여성 사회

 

1,500년전의 어느날, 전남 나주지방을 통치하던 마한의 수장이 죽었다. 그 수장은 4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 시신 발목에는 저승길을 갈 때 신도록 만들어놓은 금동신발이 신겨졌다. 그 순간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어 신발 속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시신은 관에 넣어졌다. 관은 장례를 치를 때까지 닷새 이상 외부에 보관되었다. 금동신발에 들어간 파리는 신발 속에 알을 낳았다. 그 알은 유충(구더기) 과정을 거쳐 번데기로 변해갔다. 곧이어 장례식을 치르고, 관은 물론 금동신발 속의 파리 번데기도 땅 속에서 뭍혔다. 그 번데기가 1,500년의 세월을 인고한 끝에 세상의 빛을 만났다. 지금 부여 정촌고분 인근에서 서식하는 검정빰금파리와 같은 종자였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내부에서 파리 번데기 껍질을 찾아냈다. 파리 번데기 껍질은 정촌고분 1호 돌방(石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내부의 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무덤 주인의 발뒤꿈치 뼛조각과 함께 십여 개가 발견되었다.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공 복원도 /나주문화재연구소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주인공 복원도 /나주문화재연구소

 

그러면 파리 번데기 껍데기가 들어간 신발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나주 문화재연구소의 오동선 학예연구사는 금동신발이 나온 목관에서 두개골이 나왔는데, 인골은 40대 여성의 뼈로 키가 146cm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6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영산강 유역 사회는 여성 지위가 지역 수장급에 해당할 정도로 높았다고 말했다.

 

나주 정촌고분에서 발견된 금동 신발 /문화재청
나주 정촌고분에서 발견된 금동 신발 /문화재청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법의곤충학적 분석연구를 통해 정촌고분 1호 돌방과 같은 조건(빛 차단, 평균 온도 16, 습도 90%)에서 파리의 알, 구더기, 번데기 중 어떤 상태일 때 성충이 되는지를 실험한 결과, 번데기 상태일 때만 성충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통상 알에서 번데기가 되기까지 평균 6.5일이 걸리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정촌고분 1호 돌방의 주인공은 무덤 밖에서 일정기간 장례 절차를 거친 후에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소는 파리 번데기 껍질이 검정뺨금파리(Chrysomyia megacephala)’의 것으로 추정했다. 이 파리는 현재 정촌고분 주변에서도 서식하고 있으므로 1,500년 사이에 기후 변화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 활동기간은 5~11(9월경에 가장 활발히 번식)로 정촌고분 1호 돌방의 주인공도 이 기간에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파리 번데기 껍질은 북유럽 바이킹 무덤에 매장된 시신의 옷이나, 일본 하자이케고분의 인골에 부착되어 발견되는 등 국외에서는 몇 차례 보고된 바 있다.

 

나주 정촌고분 /문화재청
나주 정촌고분 /문화재청

 

이 신발의 주인이 40대 여성이었다면, 또다른 의문은 그가 마한인일까, 백제인일까 하는 점이다. 나주에서 발견된 이 금동신발은 백제의 전통적인 금속공예기법 중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은 투조기법(透彫技法)과 축조기법(蹴彫技法)이 사용되었다. 1,500년전 당시로는 최고의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의 주장에 따르면, 전남 일대의 마한 세력은 550년까지 독자세력을 구축했고, 그후 100여년간 백제에 복속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렇다면 복암리 정촌 고분의 금동신발은 마한 귀족들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금동신발은 평상시 신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로선 금속제, 특히 금을 입힌 신발을 신고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에 복원된 신발의 한쪽 무게는 부식물이 포함된 진품이 510g, 복제품이 460g이다. 일반적인 신발보다는 크고 무거워 피장자를 위한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선 백제왕이 선물로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신발은 백제 왕릉군 또는 마한 토착 지배세력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서산, 공주, 익산, 나주지방 등 유력세력이 있었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금동신발이 백제의 지방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은 백제왕이 영토를 확장한 후 지방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하사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그동안 발굴된 금동신발 유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형태를 갖춰 처음 공개될 당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초 발견부터 보존처리가 완료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이 과정에서 금동신발의 재료학적 특징과 제작기법을 밝히기 위해 3차원 입체(3D) 스캔, 엑스선(X-ray)CT(Computerized Tomography, 컴퓨터단층촬영법)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이 동원되었다.

 

정촌 고분에서 나온 파리 번데기 껍질을 현미경으로 본 모습 /문화재청
정촌 고분에서 나온 파리 번데기 껍질을 현미경으로 본 모습 /문화재청

 

금동신발은 그동안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용 모양 장식과 문양 등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됐다. 분석결과, 금동신발의 몸판은 두께 0.5mm의 구리판에 5~10(1=1/1,000mm) 두께로 순금(99%)을 입혀 만들었음을 알아냈다.

발등 부분의 용머리 장식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바닥과 옆판에서 발견된 다양한 문양(연꽃, 도깨비, 새 문양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금속공예기법 중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은 투조기법(透彫技法)과 축조기법(蹴彫技法)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복원품은 이와 같은 분석결과를 토대로 ‘3차원 입체(3D) 스캔 등 정밀 계측 자료를 통한 설계도면 작성 용머리 장식, 양 옆판과 바닥판, 고정못, 스파이크(바닥 장식용 구리못) 등 부속품 제작 문양 표현 수은 아말감 도금 조립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특히, 전통 도금기술인 수은 아말감 기법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참고로, 이번 복원품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전시실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한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금동신발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계발을 위해 주요 문양을 국유특허로 등록한 바 있다.

 

한편 나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나주박물관은 나주시가 주최하는 제5회 대한민국 마한문화제의 일환으로 11일 국립나주박물관 강당에서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출토 금속유물의 심화연구를 위해 한국과 중국, 일본 연구자들과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논의하는 자리다.

국립나주박물관은 8일부터 내년 15일까지 기획전시실에 특별전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마한사람들, 큰 무덤에 함께 잠들다>를 개최하는데, 박물관측은 나주 정촌고분의 주인공을 마한인으로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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