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더십①…일본 치하에서 얻은 통찰력
리콴유 리더십①…일본 치하에서 얻은 통찰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1 1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군 통치방식은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것”…해방후 영국으로 유학 떠나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싱가포르 정치인으로, 영연방 시절인 1959년 초대 총리가 되었고, 1965년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주역이다. 일부에서는 권위주의자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작은 도시국가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자료는 외무부 대사를 지냈던 조원일(趙源一)씨가 2001년에 정리한 리콴유의 리더십에서 인용했다. /편집자주

 

194112월 일본군 6만명이 싱가포르를 침략하자 리콴유(李光耀)는 대학의 의무대원으로 봉사했다. 19421월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 인도, 호주의 군부대가 싱가포르에서 철수했다. 패퇴하는 호주와 인도병사들의 지리멸렬한 오합지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국군과 구르카 부대(용맹스런 네팔용병)의 침착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가 리콴유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명을 주었다. 몇년후 처칠경은 싱가포르 함락이 영국 역사상 최대재난으로서 최대규모(영국, 인도, 호주 연합군 13만명)의 항복이라고 탄식했다.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경이 싱가포르에 동인도회사 무역거점을 건설하여 불과 영국군 수백명과 1~2천명 정도의 문관으로 6백만~7백만 인구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통치하던 시대는 일본군 진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영국군이 투항한 215(마침 설날이었다) 영국 경찰관이 전부 피신하자 일부 말레이인, 중국인이 략탈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범법자를 총살하거나 머리를 잘라 거리에 효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그들 스스로 약탈을 시작했다.

일본인은 영국인에 비해 정의롭지 못했으며 잔인하고, 악랄했다. 일본인들은 다른 아시아인들을 열등한 미개민족으로 대접했다.

리콴유도 일본병사에게 발길로 걷어 채이기도 하고 뺨을 맞기도 했으며, 돈을 더 달라는 인력거꾼과 보초병이 경례를 늦게 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유도로 집어던지는 일본군장교를 보고 잔혹한 행태는 일본군의 내재적 시스템이라고 리콴유는 평가했다.

일본군은 진주하자마자 중국인 5~10만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리콴유는 두차례 시도 끝에 무사히 빠져 나왔다.

 

일본군의 투지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그들의 비열함과 사악성은 징기스칸군을 능가했으므로 미국의 원폭투하 필요성에 대한 반대는 있을 수 없다고 리콴유는 확신했다. 원폭투하가 없었다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민간인 수십만과 일본본토 민간인 수백만이 희생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천황숭배 컬트(cult)와 일본인 우월의식을 심어 침략정책을 정당화하하고, 일본인들을 체계적으로 세뇌하기 위한 수단이 다름 아닌 일본군의 무사도라고 리콴유는 생각했다. 거리에 걸어둔 중국인 머리(효수)와 중국어 경고문을 보고 리콴유는 중국 표준어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전쟁 말기에 전황이 일본군에게 불리해지자 인플레이션이 심해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리콴유는 암시장에서 귀중품을 사서 일본인들에게 팔기도하고 대학 동창생과 함께 고무대용품을 생산, 판매하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 동창생의 처제도 고무생산 공장일을 도왔는데 그가 바로 대학 최우수 학생이던 콰추(柯玉芝)였고, 후일 리콴유 부인이 된다.

일본군 점령기간(36개월)은 리콴유 생애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태, 동기 그리고 충격에 관해 일본 치하에서 그는 생생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잔혹한 일본점령군 앞에서 사회시스템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모두가 일본군의 철저한 굴종 요구를 따랐다. 모두가 일본군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의 총칼 앞에 순응했다. 새 상전을 받아드리는데 주저하거나 재빠르지 못하면 달라진 사회에서 도태되고 지위를 잃었다. 시류를 재빨리 간파하고 기회로 삼아 새 상전에게 유용한 존재가 된 자는 국가재앙의 시기에 큰 재산을 모았다.

일본군의 통치방식은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문화적인 행동은 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야만적이고 처벌이 혹독했으므로 범죄는 거의 없었다.

모두가 반기아 상태에 있던 1944년 후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범죄율이 낮았다. 모든 지역에서 10가구 단위로 자치적으로 방범순찰했는데 범죄가 전혀 없었다.

리콴유는 그때부터 범죄자는 사회의 희생자라거나, 처벌이 범죄율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주장이나, “부드러운 처벌(Soft Punishment)"의 유용성은 절대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런 주장은 영국 치하에서나 일본군 점령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실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일본의 목표는 싱가폴이 그들을 새 상전으로 받아드리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의 잔혹성, 총칼, 테러와 고문은 사람들의 행태를 변화시켰고, 충성심마저도 바꿀 수 있었다. 도덕성과 형평은 사라졌고 일본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영국 캠브리지 유학시절의 리콴유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영국 캠브리지 유학시절의 리콴유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한국인은 오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독립정신을 가지고 야만적 일본에 대해 끝까지 저항했는데 이 지역 타국민 행태와는 아주 다른 예외적인 것이었다.

리콴유의 친구 림킴산(林金山, 1963-80 장관역임)은 공산주의자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본 극악한 일본인의 진면모를 소상히 기록하고, 일본인의 예의와 머리숙 이기()는 일본인의 야수성을 감추는 겉치장에 불과하며 련합국 승리가 아시아를 구출했다고 분석한다.

 

중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인은 일본 침략군을 증오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일본군이 50년 있었다면 대만에서 성공한 것 같이 충성을 바치는 친일조직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국가로서는 역사가 짧은데다 인종이 다양하고 온순해 저항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에게 저항한 극소수는 중국계 공산당원과 장개석 추종자뿐이었다. 그들의 저항도 말레이시아에 대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중국민족주의 발로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 사악한 자를 처벌하고 덕이 있는 자는 포상하기를 모두가 갈망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싱가포르에서 5~10만명 처형명령을 내린 일본 쯔지 대령은 도망쳐 처벌을 면했다.

항일그룹이 일본군 앞잡이들을 처형했으나 극소수만 처벌받고 수많은 일본추종자들은 정의와 법망으로부터 빠져나갔다.

말레이시아 지역 중국계 중 10퍼센트는 현지 문화에 어느정도 동화(King's Chinese라고 부름)되었으나, 90퍼센트는 영국 당국과는 최소한의 접촉만 유지하고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일제침략 시 게릴라 활동을 했고 해방후 말레이시아에서 몇개 소도시를 점령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일본군 후원자를 처형하고, 중국계 상인들을 부역 혐의로 위협하고 심리적 압박을 가해 중국계 지도급 인사 다수가 공산주의 활동을 지원하게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을 장악한 후 영국유학생, 래플스 대학 졸업생 등 인텔리 그룹을 포섭해 친공산 좌익정당을 설립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그들은 일본군과 똑같이 협박과 공포를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해방후 래플스 대학이 다시 개교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므로 리콴유는 더 이상 시간을 잃지 않도록 영국으로 떠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