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는 왜 서울생활에서 싱아를 떠올렸을까
박완서는 왜 서울생활에서 싱아를 떠올렸을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2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세까지 유년시절의 자화상…역사의 굴절과 자신과 주변을 절절히 그린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경기도 개풍군의 시골마을 박적골에서 서울로 이사온 박완서라는 초등학교생이 아카시아 꽃을 뜯어먹다 구역질을 하며 내뱉는 소리다. 처음 먹어보는 아카시아 꽃은 비리고 들척지근했다. 그리고는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 입가심을 해야 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은데 불현듯 생각이 난 것이 시골에 흔히 피는 싱아라는 풀이었다. 그 풀의 속살을 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나고,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힐 것 같았다.

 

박완서 /자료: 출판사
박완서 /자료: 출판사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웅진닷컴)는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화가가 자화상 한두 장쯤 그려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쓴책이다. 박완서는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고 했다.

자서전은 소설이 아니다. 살아왔던 그대로를 쓴 글은 가공의 스토리를 창조하는 소설과 다르다. 그는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에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 보았다고 했다.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조금은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이라 불러도 되는지 걱정하면서도 굳이 소설이라 했다.

그가 이 책을 소설이라고 한 부분은 어디일까. 독자의 입장에서 그가 창작한 대목이 어디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아마도 본인만이 알 것이다. 자신 삶의 체험 가운데 가공하고 싶고, 자신을 미화하고 싶었던 대목도 있을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 이로서 작가가 어디에서 소설화를 시도했는지 짐작하는 대목이 있다. 아마 그것은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 어머니, 오빠,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와 숙모 등등이 한 말과 행동을 작가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지어내는 과정이 소설이 아닐까 한다. 초등학생이 엄마의 이중적 행태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오빠의 이해할수 없는 연애와 결혼을 정리하면서 본인들의 생각과 다른 작가의 관점이 들어 있을 것이다. 또 그땐 생각지 못했으나, 여순 연줄에 생각난 것도 가미했을 것이다.

 

싱아 /위키피디아
싱아 /위키피디아

 

박완서는 왜 싱아를 소설의 제목으로 끌어냈을까. 잡초처럼 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싱아로 대변했을까.

소설에는 싱아가 아주 드믈게 등장한다. 서울 현저동에 이사와 학교에 가면서 아카시아를 먹다가 구역질을 하며 시골마을에 흔히 핀 싱아를 생각해 낸다. 척박한 도시는 시골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그 흔하던 잡초도 자라지 않았고, 외래종 아카시아만 인왕상 자락에 자라고 있었다. 생활이 극적으로 반전한 혼란 속에서 도시의 메마름을 반어적으로 생각해 내면서 농촌의 풍요로움을 대변하는 싱아를 끄집어 낸 것 같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은 시골 소녀가 서울로 상경해 일제 치하와 해방후 혼란, 6·25를 거치는 20년간의 유년시절을 자전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마무리 시기는 1·4 후퇴 때 인민군에 끌려간 오빠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1951년이므로, 1931년 생인 작가로서는 20살이 된다.

작가는 태어나 20살이 되기까지의 삶을 회상했다. 어릴 때 박적골의 풍경, 어머니란 존재, 오빠란 존재, 조부모, 친척들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지은이가 작품을 발표한 1992년을 기준으로 하면 나이가 60에 이 글을 썼을 터인데, 그 나이는 어린 시절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다. 어린시절을 기억해 내는 일이 참으로 힘든 나이에 그는 기억을 더듬어 냈다. 아마도 소설적 터치가 없었더라면 기억을 생생히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그 많던 싱아는…」은 일제시대, 해방후, 6·251·4 후퇴 때까지 시대상황을 주인공이 탄 열차의 차창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게 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박완서의 후년배들이다. 박완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일제 치하의 삶, 해방후의 극심한 사상 갈등, 전쟁 시의 인간 굴절상 등을 여과없이 그려냈다. 그것들은 후인들에게 새로운 것들도 배우게 했다.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구체적인 제제가 없었다는 것, 해방후 좌익으로 빠지는 사람들의 정서, 1·4 후퇴 때 피난가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그후의 고통 등은 현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깨게 한다. 고정관념이란 배운 것이다. 후대의 집권세력들이 만든 것이기도 하다. 당대를 산 작가가 그려낸 70~80년전 상황이 그의 후배이기도 한 독자들에게 새롭게 읽혔다.

 

책표지/ 자료: 출판사
책표지/ 자료: 출판사

 

소설의 시작은 아름답게 시작한다. 개풍군 덕적골의 어린 시절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자연의 풍요함 그 자체였다. 아들딸의 출세를 지향하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오면서 주인공의 상황은 바뀐다. 서울의 더럽고 삭막한 풍경이 소녀를 실망케 한다. 자신이 학교에 다니고 오빠가 취직하고 엄마가 집을 사는 일들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그 엄마가 지금 살아있다면 아마도 강남의 큰 손이 되었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때의 모습도 작가의 기억에 생생했다. 해방후 지식인들의 좌편향도 기억의 일각을 차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좌익에 빠지는 과정도 그렸다.

좋은 기억은 오래 남고 생생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뇌를 짓누르는 무언가에 의해 갇혀 나오지 않는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지자 피난 못간 작가는 공산당 치하의 서울대를 다니다가 서울 수복후 빨갱이로 찍혀 고통받던 장면도 그렸다. 작가는 기억하기 싫었던지 이 대목은 간단한 서술로 넘어갔다.

소설에는 자신이 소설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도움을 준 인물들이 등장한다. 숙명여고 시절 담임선생이었던 소설가 박노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여고시절 단짝 친구는 소설가 한말숙이다.

소설은 만신창이가 된 오빠를 수레에 실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살던 현저동으로 가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거기서 작가는 캄캄한 현실 앞에서도 찬란한 예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가 이렇게 태어났다는 걸 그는 주장하고 싶었던 게다.

 

소설 그 많던 싱아는…」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똑똑하던 오빠는 현저동에 돌아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완서는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8PX 초상화부에 근무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회사 소속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다.

결혼 후 평온한 삶을 살면서 책읽기를 좋아 했다. 전혀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다가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쓴 글이 40세가 되던 1970'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고, 데뷔작이었다.

박완서는 2011년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에서 팔순의 나이로 이 세상과 이별했다. 14녀를 두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휘청거리는 오후(1977), 목마른 계절(1978), 도시의 흉년(1979),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을까(1995), 친절한 복희씨(2000)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