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가 떠올린 싱아, 손탁 손에 보존돼 귀국
박완서가 떠올린 싱아, 손탁 손에 보존돼 귀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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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서양 여인이 싱아 표본 만들어…2015년 러시아에서 120년만에 돌아와

 

소설가 박완서는 1992년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에서 작가는 서울로 이사를 와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인왕산을 넘어 사직동 매동초등학교를 등교하는 길에 문득 고향땅에서 흔히 나던 싱아를 떠올렸다.

1931년생 박완서가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인왕산 기슭에 싱아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1930년대 후반에 인왕산에 싱아가 사라진 것이다.

 

손탁이 채집한 '싱아'의 표본 /국립생물자원관
손탁이 채집한 '싱아'의 표본 /국립생물자원관

 

그런데 박완서보다 30년전에 서울에 살던 한 외국 여인은 싱아를 채집해 표본해 놓았다가 긴 세월이 흘러 박제된 싱아가 백여년만에 서울에 되돌아 온 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손탁(孫澤, 18381922)이라는 서양 여인이다. 정식 이름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프랑스 알사스 지방 출신이다. 국적은 독일, 인종은 프랑스인이다.

그녀는 프랑스어·독일어·영어·러시아에 능통했고, 조선말도 익혀 구한말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 사절은 물론 조선의 왕족, 괸라들과도 끈끈한 친분을 과시했다. 그녀는 정동에 호텔을 운영하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활약했다. 특히 민비의 신임이 두터웠다.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을 러시아대사관으로 피신시켜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이다.

 

2015년 러시아 코마로프식물연구소는 구한말에 채집돼 수장고에 100130년간 보관하던 한반도산 관속식물 표본 100점을 한국정부에 기증했다. 관속식물은 양치식물과 종자(겉씨·속씨)식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식물을 말한다.

표본 중 26점은 손탁이 서울에 머물면서 채집한 것이다. 채집 지역은 창덕궁, 탑동(현 낙원동), 진고개(현 충무로), 효창동 등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싱아 4점이 포함됐다.

싱아는 우리나라와 중국에 주로 서식하는 마디풀과 식물이다. 전국의 산기슭에 많다. 채집한 식물은 식물 연구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한 세기를 훌쩍 보내고 나서 고국에 돌아온 우리 식물들에서 안타까운 우리 역사 속에 활약한 서양 여인의 손길과 숨결이 드러난 것이다.

 

싱아 /위키피디아
싱아 /위키피디아

 

그러면 손탁이라는 여인은 어떤 인물인가.

독신녀였던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을 찾아온다. 그때 나이 32. 그녀와 베베르 공사는 먼 친척이었다. 당시 조선의 고관 윤치호는 일기에 베베르 공사의 부인의 남동생 마크의 부인되는 사람이 손탁의 여동생이라고 썼다. 즉 베베르에겐 처남의 처형인 셈이다.

 

그녀는 '미스 손탁'이라 불렸다.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1909년까지 24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조선에 머물렀다. 그가 조선에 올 당시는 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설치며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였다.

그녀는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민비의 신뢰를 얻었고, 이를 기회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18961909황실전례관으로 일했다.

왕실에 서양요리를 소개하면서 고종에게 커피 맛을 알게 해줬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손탁은 왕실과의 인연을 활용해 특유의 사교력으로 외국 고위 사절과 조선 황실의 가교 역할을 하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고종과 민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 사이 사이를 접선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일본과 청을 반대하며 조선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두차례의 조·러밀약도 그녀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고 한다.

 

1900년대 손탁호텔 /문화재청
1900년대 손탁호텔 /문화재청

 

고종은 고마운 마음으로 1895년 그녀에게 정동의 한옥을 한 채 선사한다. 이 한옥은 을미사변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정세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된다. 이 한옥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이다.

경인선이 완공되고, 종착역이던 서대문역 인근에 있던 황실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로 운영됐다. 객실 다섯 개로 시작한 호텔은 1902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양관으로 재건축한 뒤, 손탁에게 경영을 맡겼다. 2층은 VIP실로 사용됐고, 1층에는 객실 또는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됐다.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었다.

이 호텔은 조선을 찾는 외국의 유명 인사들이 묵는 단골 숙소가 되었다.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과 젊은 시절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도 묶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머물며 배후에서 조종했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1909년 그녀에게 힘을 실어줬던 러시아는 혁명의 와중에 소용돌이치고, 가까이했던 조선 왕실은 몰락 직전에 있을 때 손탁은 자신의 나라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때 나이는 56. 32살의 청춘에 왔다가 늘그막에 귀국한 것이다.

일본인 키쿠치 켄조는 조선잡기(1931)라는 책에서 손탁의 말년을 이렇게 서술했다.

“19099, 손탁은 조선을 떠났다. 그의 친구는 거의 돌아갔고, 그의 우방은 패전해 조선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조선에 왔을 때는 30세의 단려한 꽃과 같은 미모를 지녔으나, 떠날때는 훤하던 풍모에 파란의 조선 30년사를 짊어진 듯했다. 그녀는 두둑해진 돈주머니 무게보다도 내동댕이쳐진 경성의 풍파에 의해 쫓겨나는 것처럼 돌아갔다.”

일본인에게 손탁은 적인 러시아의 음모꾼이었다. 일제가 1934년에 펴낸 경성부사첫권에 손탁을 요주의 대상으로 꼽았고, 그의 동향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손탁은 그는 고국에 돌아가 프랑스 명승지인 칸(Cannes)에 별장을 지어, 그곳에다 조선에서 가져온 재산을 쌓아두고, 유유히 만년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재산의 대부분은 여동생 명의로 러시아 은행에 저금해 러시아 기업에 투자됐다고 한다. 곧이어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손탁의 저금도 투자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돈은 사라졌지만, 그녀가 채집한 식물의 표본은 간난의 세월을 거쳐 이번에 고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손탁의 사망에 관한 소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그녀가 칸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한 사실이 밝혀졌다. 손탁의 추천으로 190519061년 동안 조선 황실의 외교전례를 담당했던 독일여성 엠마 크뢰벨의 저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의 번역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탁의 말년 스토리가 드러났다.

크뢰벨 저서를 번역한 김영자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박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192277일 오전 8시 칸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고 소개하고 "칸 시립천주교묘지를 찾아가 묘비에 참배했다"고 설명했다. 68. 묘비에는 '조선황실의 서양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손탁호텔 터 /문화재청
손탁호텔 터 /문화재청

 

손탁호텔은 손탁이 귀국한후 경영난에 빠져 1917년 이화학당에 넘어가 기숙사로 사용되다 1922년 프라이홀 신축을 위해 헐렸다. 프라이홀도 6.25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손탁호텔 터에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영화 암살에서 손탁호텔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시도가 미수에 그치는 장소로 등장했다. 또 구한말 손탁호텔의 스토리를 엮은 뮤지컬이 공연되기도 했다.

조선왕국의 말기를 체험하고, 북국 러시아의 역사변동을 거치면서 손탁의 꿈과 영화는 한낮 구름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이 땅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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