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더십③…소년기에 의사결정 배워
리콴유 리더십③…소년기에 의사결정 배워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0.13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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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서 후에 부인이 되는 콰걱추와 1·2위 경쟁…말레이 학생들과 친분관계

 

리콴유(李光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리콴유의 증조부는 광둥성(廣東省)에서 19세기 중반에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조부는 싱가폴에서 태어나 영어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영어학교, 중국어학교등으로 분류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부는 백만장자 화교가 소유한 증기선에서 일한다. 그때 선장과 기관사들이 열대 더위에서도 늘 정장을 하고, 식사도 격식있게 하는 영국문화전통을 접하면서 영국인들의 기강, 질서, , 효율성에 큰 감명을 받고, 영국을 흠모하게 되었다.

조부는 결혼 후에 그 백만장자 화교의 싱가폴 대리인(agent)이 되어 큰 재산을 모아 고무농장에 투자했는데 대공황 시절(1927-1930)에 고무가격 폭락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조부는 미식가였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외조부는 고무농장뿐 아니라 시장과 상점에 재산을 분산해서 투자했기 때문에 타격을 덜 받았다. 외조부는 정식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근검절약하여 열심히 일하여 번돈을 모두 알뜰히 투자했다.

 

공황 때부터는 외조부 댁에서 리콴유 5형제와 사촌 일곱명 등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동생과 사촌들은 모두 어렸으므로 종종 이웃 어촌의 자기 나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연날리기, 팽이,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했는데 이때 리콴유는 게임에 이기려는 강한 의지와 투지를 기르게 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책이 희귀했으나 스릴러, 탐정소설, 웨스턴 등 광범위한 분야의 서적을 독파했다.

 

부친은 평범한 부잣집아들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가끔 도박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모친은 부친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용기와 힘,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분이었다. 리콴유 모친은 곤궁한 시절 요리책을 출간했는데 작고한 후 지금까지도 잘 팔리고 있다.

모친 덕분에 리콴유와 동생들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모친의 희생에 보답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들은 늘 최선을 다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모친이 중요한 가사 문제에 관해 장남인 리콴유와 상의를 했으므로 리콴유는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어떻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교육에 관심이 큰 외조모는 리콴유가 중국어를 배우도록 중국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리콴유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호소해 영어학교로 옮겼다. 초등학교 7년 과정을 6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해 최우수학생만 받아들이는 명문 래플스 인스티튜션(Raffles Institution)에 입학한다. 그 학교는 영국 사립학교(Public School)를 모델로 삼았고 교과목은 대영제국 전체에 통용되던 캠브리지 자격증 획득 준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리콴유는 토론에 자주 참여하고 크리켓, 테니스, 수영 등 운동과 보이스카웃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담임선생님은 리콴유가 장차 높은 지위에 오를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최종 캠브리지 자격시험에서 그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영국 캠브리지 유학 시절 리콴유(1947)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영국 캠브리지 유학 시절 리콴유(1947) /National Archives of Singapore

 

리콴유 부모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업에 종사하면 불경기에도 타격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전문직업을 택하도록 종용해 리콴유는 영국에 유학해 변호사자격을 얻을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 2차대전이 치열해지고 있어 우선 싱가포르 명문대학인 래플스 대학(Raffles College)에 최고장학생으로 입학한다.

리콴유는 대학에서 수학, 영어,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수학은 전체수석을 했으나, 영어와 경제학은 2위를 해 쇼크를 받는다. 1위는 래플스 인스티튜션(Raffle Institution)의 홍일점 녀학생이던 콰걱추(柯玉芝) 양이었다. (그녀는 후에 리콴유의 부인이 된다.)

그들은 전국에서 두명을 선발하는 여왕 장학생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라이벌이 된다.

래플스 대학(Raffles College)에는 싱가포르 뿐만 아니라 말레이 전역의 최우수학생들이 운집했는데 영국이 직접 통치하는 싱가포르에서는 인종차별이 없었으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원주민이 정치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년 학생 100명중 말레이 학생 20명은 주정부 장학금을 받았다.

활력 있고 근면한 중국인과 인도인을 두려워하는 말레이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강한 응집력을 보였다. 말레이인들은 취직, 사업, 학교와 대학입학을 위한 경쟁에서 명석하고 의지가 강한 중국, 인도인에게 밀려나 그땅의 주인인 자기들이 약자가 되고 유리한 지위를 빼앗기게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싱가포르의 인구 분포는 중국계 77%, 말레이계 14%, 인도계 8% 등이었다.

능력이 우월하고 자신감을 가진 때문인지 중국이나 인도인들은 말레이인들과 같은 응집력이 없었다. 그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단결하지 못했다.

 

리콴유에게는 대학시절이 말레이인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싹트는 시절인 동시에 장래 정치적 동지가 될 말레이 학생들과 친분을 쌓고 정치활동에 입문하는 시기였다.

명문대 래플스 대학(Raffles College)에 다닌 것이 변호사 시절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각계 인사들과 쉽게 유대를 맺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영국 식민지 교육 시스템에 의해 양성된 최고 엘리트 계층이 손쉽게 동창생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교과서로 공부하였고, 공통된 태도와 특징이 몸에 배어 말솜씨(화술)와 스타일, 복장, 일처리 방법이 똑같아 네트워킹이 용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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