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더십⑤…말레이시아와 합병 추진
리콴유 리더십⑤…말레이시아와 합병 추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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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산업 없고 식수공급 부족, 말레이시아 연방 지지…공산당과 결별

 

1959년에는 싱가포르의 실업률은 12%, 경제사정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공무원 부패가 만연하고 관료 조직이 쇠퇴하고 있다. 리콴유(李光耀)는 차기 선거까지 4년을 더 방치하면 정책 시행을 담당할 관료 조직이 붕괴되어 집권 후의 국가건설계획에 큰 차질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집권을 위해 진력하기로 결심한 리콴유는 구속 수감된 인민행동당(PAP) 공산주의자 4명이 싱가포르는 민주사회주의비공산 말레시아와 통합해 독립을 추구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한다. 리콴유는 그들이 석방되어 정치 활동을 재기할 때 이를 발표하는 조건을 요구했다. 그들은 구속된 상태에서 리콴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석방의 기회를 얻기 위해 선거에서 공산당 추종 세력이 PAP를 지원하도록 한다.

집권당 인민연합은 부유층을 기반으로 보수 성향이어서 싱가포르에게 형님격인 말레이시아의 지원을 받았고, 서방 세계의 지지도 받았으나, 미국인으로부터 뇌물 받은 것을 리콴유가 밝혀내 타격을 받는다. 당시 서방 세계에서는 리콴유를 숨은 공산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영국 고위층은 리콴유를 숨은 반공주의자(Crypto- anticommunist)라고 보았다.

PAP 입후보 대부분은 선거 비용을 각자 부담하고, 리콴유는 원고 없이 중국 표준어(만다린)로 연설해 대중의 호감을 사서 51석 중 43석을 확보하는 일방적 승리를 거둔다. PAP 43석 중에는 상당수 공산주의 추종자가 있었고, 기존 정치세력(8)은 참패한다.

 

총리 취임 후 말레이시아와 영국이 공산당 소탕을 요구했다. 싱가포르 경찰도 동조했다. 하지만 리콴유는 다수 중국계가 스스로 공산당을 배척할 때까지 공산계 구금을 보류한다. 그 틈을 타서 공산세력은 노조를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한다.

리콴유 총리는 집권 초부터 다이나믹하게 행동하고 일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리관유는 리더십을 이렇게 정의했다.

국민 모두는 자기존경심(self-respect)을 가져야 하며, 자기들 국가 건설에 진력해야 한다. 지도자의 역할은 국민이 배우고, 열심히 일하고, 생산적이고, 응분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확고한 체제(strong framework)를 부여하거나 창조하는 것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리콴유를 만나 계속 선거에서 승리하고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문의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리콴유는 국민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국민 이익을 증진하도록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을 알고있다. 복잡한 정치·경제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반국민은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게 된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나는 확신하는 것이 아니면 절대 발설하지 않았고, 국민은 내가 정직하고 진지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내 최대의 자산(asset)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치정부 총리 시절에 많은 일을 했다.

집권 초기에 총리와 각료가 참여해 거리와 해변 등에 대한 청소 운동을 전개했다.

또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장관, 고위 공직자 봉급을 2년간 삭감했다. 우선 영어사용 상류층이 모범을 보여 다수 중국계 지지를 유도하고, 그들이 중국인이 아닌 싱가포르 시민이라는 의식을 키우도록 했다.

경제개발계획 실시를 위해 고위 외국 전문가를 채용했다. 시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사회단체, 사교클럽, 스포츠·음악·요리클럽을 관장하도록 했다. 지역센터를 1백개 건립해 직업교육, 레크레이션, 스포츠센터를 운영케 했다. 관광진흥 전략을 채택해 1961년을 “Visit the Orient"해로 지정했다.

노조의 불법·정치적 파업을 규제했다. 이를 위해 노조원 비밀투표제를 도입하고 호주에서 도입한 중재재판소를 설립했다. 여성의 해방을 위해 정치참여를 확대했다. 고층아파트를 지어 주택개량사업에 나서 서민·빈민들을 수용했다.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벌이고, 부패행위 조사국을 설치했다. 총리가 정보기관, 범죄조사국을 직접 지휘했다.

조직폭력배, 윤락·홍등가를 일소하고, 중국어 학교 우수졸업생을 공직에 채용하고, 우수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리콴유가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선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리콴유가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선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리콴유에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합병 문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이 중국·인도인에 비해 능력이 모자라 중국·인도 인구비율이 증가하는 것을 경계하고 말레이인의 우월한 지위 유지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국계가 다수(76%)를 차지하는 싱가포르와의 합병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공산화 가능성이 높은 점에 대해서는 말라야 안보위협 요인이 된다고 우려했다.

리콴유는 당시 인구 150만이었던 싱가포르가 후방산업 기지가 없는 무역항에 불과해 자립경제유지가 어려운데다 비우호적 말레이시아로부터 식수공급을 받아야 하고, 적대적 인도네시아(당시 인구 1, 군병력 40) 주변에서는 독자적 안보 유지가 어렵다고 보았다. 또 충분한 대책없이 너무 일찍 싱가포르가 독립하게 되면 치안 불능, 안보 위기 상황에 처해 공산세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이런 판단을 기초로 리콴유는 말-싱가포르 합병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리콴유는 영국 지원을 받으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보르네오(사라와크, 북보르네오) 합병을 추진함으로써, 말레이 인구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 연방설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말레이시아연방에 대해 보르네오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강력한 반발에 대응해 영국과 미국, 호주는 말레이시아를 적극 지원했다.

리콴유는 협조 관계를 맺었던 공산주의자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말레이시아측 압력에 의해 공산분자 체포령(1963)을 내릴 때도 PAP와 협조관계가 있었던 자에게는 망명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신사적 행동규범(rules of decency and honour)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싱 합병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리콴유는 열정적이고 집중적인 선거구 방문(매일 2-3개 선거구)과 열정적 유세활동(많을때는 하루 10, 4개 국어로 연설)으로 공산당의 조직력을 능가하는 활동을 보였으며, TV의 출현으로 폭력적, 선동적 모습을 가진 공산당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리콴유의 우세한 전략과 정책, 실행에 밀린 공산주의는 계속 전략적 실수를 범하고 참패와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리콴유는 인도, 이집트 등 제3세계 국가 30여국과 유엔을 방문해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1964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 회의에서는 아시아 민주사회주의의 성공 조건은 적절한 국민생활 수준 보장과 효율적인 정부 유지라고 설파해 당시 세계적 지도자였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국 노동당 지도자회의에 초청받아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 총리 등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게 된다. 1970년대말 영국 경제가 극도로 침체하고 노사분규가 극심할 때 영국 일각에서 리콴유를 영국수상으로 초빙해야한다고 얘기할 정도로 그는 영국과 가까웠다.

 

리콴유는 자치정부 총리가 된 후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벌여 승리했다.

리콴유는 집권후 전문가를 동원해 고급 공무원에 대한 공산주의 실상을 교육시키고 공산세력의 파괴 활동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리콴유는 공산주의 온상이 되고 있는 남양(南洋)대학에 대한 지원을 통해 우수학생의 공산주의 전향을 막고, 최대 다수 중국계가 사용하는 푸젠어(福建語)는 칠성(七聲)으로 다른 지역 출신 중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것을 피와 땀을 흘리며 배우고 익혀 많은 푸젠어 사용 중국계의 마음을 산다.

확고한 자신감을 얻은 리콴유는 PAP내 공산주의자들이 말-싱 합병을 반대하고 단독 독립을 주장하는 것을 좋은 구실로 삼아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기로 했다. 리콴유는 자신의 정치투쟁, 공산당 수뇌와의 비밀회담, 공산주의자의 진면모, 미스테리 그리고 자신의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를 12회에 걸쳐 라디오에 육성으로 방송하고 책으로도 출간했는데 그것이 공산당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다수 중국계 인식을 바꾸는 획기적 전기가 되었다. 리콴유의 방송은 정치 스릴러 같이 흥미진진하고 인기 높은 프로그램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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