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투르크④…술탄 형제살해의 폐습
오스만투르크④…술탄 형제살해의 폐습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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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질서를 위해 형제 죽이는 것 마땅하다”…후에 감금 제도로 변경

 

구약성서 창세기에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이른바 형제살해의 원형이다. 형제살해는 영어로 siblicide, fratricide라고도 하는데, 동물의 세계에서 보이는 형제 살해가 인간사회에서 벌어진 것이다.

우리 역사에 조선초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이 일종의 형제살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형제살해는 권력 다툼의 과정에서 빚어진 일시적 사건이었을 뿐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동양 돌궐족(突厥族)에서 파생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초기에 한 왕자가 술탄에 오르면 다른 왕자를 죽이는 형제살해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었다. 야만적인 이 제도는 100년 정도 지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왕조계승은 유럽에서와 달리 남자 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유럽 왕조들도 남성 승계를 원칙으로 했지만, 예외적으로 여자가 황제 또는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에서는 철저하게 남자만이 술탄에 올랐다.

오스만의 술탄 계승전은 3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단계는 적자생존의 시대, 둘째는 형제살해의 시기, 마지막 단계는 연장자 우선의 승계로 이어진다.

 

소아시아에서 왕조가 처음 시작될 때 오스만의 술탄 계승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칙에 따랐다. 유목민족이었던 투르크족에게는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초원의 원칙이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유목민족에게는 농경 정착종족에서 뿌리내린 장자계승의 원칙이 없었다. 장자(長子)가 아니라도 유능한 왕자, 즉 힘 있는 왕자가 다른 계승권자를 누르고 술탄에 올랐다. 조선초기 이방원이 임금이 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다.

술탄은 왕자들을 지방의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왕자들은 지방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이웃나라를 침략하거나 병합해 세력을 확대한다. 아버지가 죽으면 차기 술탄이 정해질 때까지 일정기간 공위(空位)의 시기가 생긴다. 이 기간에 왕자들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거나 중앙의 세력들과 연합한다. 마지막으로 중앙을 장악한 왕자가 새 군주가 되면서 공위시대를 마감한다.

왕자들은 아버지가 나이 들면 차기 대권을 위해 중앙의 귀족들과 연결해 음모와 전투를 벌여왔다. 경험이 많고 정보량이 뛰어나며, 권력 중개인들의 지지를 얻을수 있는 왕자가 술탄이 되었다.

술탄 승계에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쫓아내는 경우가 생겨났다. 술탄 셀림 2세는 맏아들을 서아나톨리아의 지방 행정관으로 보내자 반역을 꾀해 아버지를 밀어내고 술탄에 올랐으니, 무라드 3세다.

 

형제살해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정복자 메흐메드 2(Mehmed I, 1451~148I)때 법제화되었다. 그 이전에도 일부 형제살해가 있긴 했지만, 법제화되지는 않았다.

메흐메드 2세는 술탄 무라드 2(Murad II)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첫째 형은 1439년에 죽었고, 둘째 형도 1444년에 잠을 자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 14512월 아버지 무라드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죽자, 그는 제위를 계승했다. 나이 19살에 술탄에 오른 그는 즉위와 동시에 동생 모두를 비단 줄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메흐메드 2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카눈나메(kanunname)라는 법령을 만들어 형제살해를 정당화했다.

메흐메드 2세는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정당화했다. “내 아들중 누군가 술탄의 지위를 물려받는다면 세상의 질서를 위해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슬람 율법이 그러한 조치를 용인한다. 그러므로 이 조치를 시행하도록 하라.”

오스만의 사회에도 일반인의 살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술탄이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것만은 허용되었다. 제왕은 무치(無恥)하고, 아랫것들과는 달랐다. 술탄은 친형제는 물론 사촌형제까지 살해할 수 있었다. 권력 분쟁의 불씨가 남아 있는 형제는 누구나 목숨조차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많이 형제를 살해한 술탄은 메흐메드 3(1595~1603)였다. 그는 술탄이 된 직후에 동복과 이복형제, 사촌형제까지 포함해 모두 19명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여론이 나빠졌다. 아무리 술탄이라도 동생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할 도리가 아니었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의 왕자궁(카페스). /위키피디아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의 왕자궁(카페스). /위키피디아

 

메흐메드 3세의 아들 아흐메드 1(Ahmed I, 1603~1617)는 아버지처럼 강인하지 못했다. 시와 경마를 좋았다. 아버지 메흐메드 3세는 제위를 물려줄 아흐메드가 형제를 죽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죽기 직전에 아흐메드의 형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아흐메드가 죽여야 할 형을 아버지가 죽인 것이다.

그는 술탄에 오른 후 형제살해의 비극을 종식시켰다. 그후 오스만 제국에는 200년후 1808년 숥탄 아흐무드 2세가 왕실 내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형 무스타파 4세를 살해한 일을 제외하고 형제살해는 없었다.

 

술탄가의 형제살해 풍습이 사라진 후 연장자 승계의 원칙이 정립되었다. 아흐메드 1세가 죽은 1617년부터 제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이 원칙이 적용되었다. 술탄이 승하하면 죽은 술탄의 삼촌이나 형제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왕족이 술탄을 이었다.

술탄이 되지 못한 남성 왕족은 살아 남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살아도 사는게 아니었다. 술탄이 되지 못한 자들은 카페스(kafes)라는 곳에 갇혔다. 케페스는 터키어로 새장(cage)라는 뜻인데, ‘황금감옥으로도 불렸다. 남성용 하렘(Harem)이었다.

카페스에 갇힌 왕실 남자들은 왕실 경호대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이곳에 갇힌 왕족 남성들은 바보처럼 지내야 했다. 혹여 술탄이 갑자기 승하했을 때를 위해 통치를 준비하지도 못했고, 아들을 낳지도 못했다.

어린 남자아이들은 하렘에서 어머니 곁에 있다가 사춘기가 될 무렵에 카페스에 갇혔다. 이들은 하렘의 어머니와 시종들에 둘러 싸여 살았다.

카페스에 같인 자들도 언젠가 술탄이 될 자격은 있었다. 카페스에서 최장 39년을 지내다가 술탄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 제도도 문제가 많았다. 술탄이 바뀔 때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던 권력투쟁은 완화되었다. 하지만 술탄이 후사 없이 타계할 경우 카페스에 유폐되어 있는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이 뒤를 이었는데, 이 경우 제국은 대개 물정을 잘 모르고 몸이 허약한 술탄을 맞아야 했다. 궁정의 음모도 사라지지 않았다. 제국의 역사에서 일어난 17번의 술탄 폐위 사건 중 14번이 카페스 시대에 일어났다.

 

형제살해는 야만적인 행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스만의 역사에서 형제살해의 시기에 제국이 강대했고, 형제살해가 중단된 이후 나라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형제간에 치열한 싸움 끝에 탄생한 술탄이 나라를 강하게 했고, 연장자 순서대로 안이하게 집권한 술탄은 나라 일에도 안이했던 것이다.

 

아벨을 죽이는 카인. (Gustave Doré 작) /위키피디아
아벨을 죽이는 카인. (Gustave Doré 작)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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