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썩이는 카탈루냐…4백년 독립투쟁
다시 들썩이는 카탈루냐…4백년 독립투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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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자치 확보 후, 스페인 지배 하에서 세 차례 독립전쟁 벌여

 

스페인의 카탈루냐(Catalunya)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스페인 대법원이 2017년 카탈루냐의 주민투표를 주도한 자치정부 지도부에 대해 징역 9~13년의 중형을 때렸기 때문이다. 판결이 나오자 카탈루냐의 주도 바르셀로나 도심에는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2년전인 2017101일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투표결과를 토대로 그해 1027일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투표 자체가 불법이라고 규정하며 자치정부 지도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이번에 자치정부 지도부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4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갖는다. 굳이 꼽자면 2017년 독립 선언이 네 번째다. 그러면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왜 끈질기게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카탈루냐 기 /위키피디아
카탈루냐 기 /위키피디아

 

카탈루냐는 프랑스에 의해 건설됐다. 9세기초 프랑크 왕국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카탈루냐 지역에 백작령을 설치했다. 프랑스에 카페 왕조가 들어서자 987년 카탈루냐 백작 보벨 2세가 자주성을 확보해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종주국인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에서 카페왕조로 바뀌며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확보한 것이다.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당시 1살 배기 아라곤 왕국의 공주 페트로닐라 1세와 결혼했다. 후계자가 없던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는 베렝게르 4세에게 섭정을 맡기고, 이듬해 어린 공주에게 왕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로써 카탈루냐-아라곤 두 나라의 연합왕국이 형성됐다.

아라곤 연합왕국 시절인 1283, 카탈루냐는 자치정부를 의미하는 헤네랄리타트(Generalitat)’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법령을 만들어 문서화했다. 아라곤도 카탈루냐의 자치를 인정하며 각자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했다.

15세기말 이베리아반도 중부 카스티야공국의 이사벨3세와 아라곤공국의 페리디난도가 결혼함으로써 연합왕국을 세우고, 1492년 남쪽에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를 정복해 반도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에스파냐를 통일한다. 이때 아라곤과 합병국가를 형성했던 카탈루냐는 덤으로 스페인에 합병되었다. 스페인은 합병에 합병을 거쳐 통일왕국을 만들었다.

 

카탈루냐 위치 /위키피디아
카탈루냐 위치 /위키피디아

 

카탈루냐의 1차 독립운동은 1640년에 발생한다. 스페인 통일왕국은 사실상 카스티야에 의해 통치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필리페 2세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하려 했다. 때마침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 막바지에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자, 카스티야 중앙 정부는 카탈루냐에 전쟁 경비의 부담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병력과 물자 징발을 요구했다. 당시 카탈루냐 지역은 흉작과 역병 등으로 고난을 겪고 있었는데, 남의 전쟁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독립하자는 기운이 일어났다.

16406월 카탈루냐에 농민 봉기가 발생하며, 반란군이 바르셀로나로 행군했다. 농민봉기에 힘입어 토착 지배층도 함께 카스티야에 대항하게 됐다. 카탈루냐 독립군은 이듬해인 1641년 헤네할리타트 의장이었던 파우 클라리스(Pau Claris)를 앞세워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손을 내밀었다. 공화국은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대공국(Archiducado)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으려 했다.

스페인(카스티야) 왕실은 군대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프랑스의 루이 13세도 카탈루냐를 지배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다. 카탈루냐를 놓고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10년 이상 전쟁이 지속됐다.

하지만 프랑스에 루이 13세가 죽고 즉위한 루이 14세는 카탈루냐에 배신을 때렸다. 루이 14세는 카탈루냐와 협의 없이 스페인 펠리페 4세와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시켰다. 1659년 체결된 피레네 조약은 카탈루냐의 북부 영토였던 루시용(Roussillon), 세르다냐(Cerdanya)을 프랑스로 넘기고, 남부 대부분의 카탈루냐를 스페인으로 귀속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두 강대국에 의해 카탈루냐는 찢겨져 다시 스페인 치하로 들어갔다.

 

카탈루냐 독립의 상징 헤네랄리타트 궁 /위키피디아
카탈루냐 독립의 상징 헤네랄리타트 궁 /위키피디아

 

두 번째 독립운동은 18세기초 스페인왕위 계승전쟁 때 일어났다.

1699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국제 전쟁이 벌어졌다. 카를로스 2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한 명은 프랑스 루이 14세와, 또 한 명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Leopold) 황제와 결혼했다. 프랑스와 부르봉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서로 스페인 국왕의 권리를 주장하며 전쟁을 벌였다. 최종 승자는 프랑스였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Felipe)가 스페인왕으로 지명되어 마드리드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새로 즉위한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그러자 카탈루냐인들은 1705년부터 독립 운동을 벌였다.

이에 부르봉 왕가의 경쟁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자치 제도의 존종을 표명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이번에 카탈루냐는 합스부르크에 속았다.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은 17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세습 작위를 물려받게 되자 스페인 국왕 자리를 포기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탈루냐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1714년 위트레흐트조약을 체결해 카탈루냐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시켰다. 결국 1714년 스페인 카스티야 왕실 군대와 프랑스군에 의해 바르셀로나는 함락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는 칙령을 선포해 1714년 카탈루냐 자치정부를 해체했다. 곧이어 바르셀로나 통치조직에 카스티야 출신들로 채워 카탈루냐의 언어와 관습을 폐지했다. 또 자산을 몰수하고 전쟁 배상금을 물렸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12~1814년 짧은 기간에 카탈루냐는 프랑스령으로 귀속되었다가 스페인으로 이양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 1838년의 판세 /위키피디아
스페인 내전 중 1838년의 판세 /위키피디아

 

세 번째 독립운동은 20세기초 스페인 내전 때다.

1931년 스페인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파들이 승리하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때 카탈루냐의 헤탈리타트가 복권되어 자치를 회복했다.

헤날리타트 의장인 프란섹 마시아(Francesc Macià)는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하고 헌법을 제정하려 했다. 하지만 공화국이 출범해도 카스티야 정부는 카탈루냐의 독립을 반대했다. 결국 카탈루냐 공화국 출범은 무산되고 자치법을 공포하는 것으로 그쳤다. 1934년에는 카탈루냐에서 총파업을 통해 스페인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헤네랄리타트는 다시 강제 해산됐다. 1936년 다시 복권되었다가, 프랑코 장군이 1939년 내전을 종식시키고 집권하자 헤날리타트는 해산되고 의장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카탈루냐인들은 공화파를 지지했다. 바르셀로냐는 공화파 인민전선 정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는데, 프랑코 군대의 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았다. 19311월 프랑코 군대는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프랑코는 스페인 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자치 체제 또는 분리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카탈루냐는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가장 큰 억압을 받았다. 공공장소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되고, 정치, 사회, 군사 통제권까지 박탈 또는 제재를 받았다.

프랑코가 사망한후 1977년 카탈루냐는 헤네랄리타트를 부활시켰다.

 

2017년 카탈루냐는 국민투표의 의회 표결을 통해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카스티야를 본거지로 한 스페인 중앙정부는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의 수반을 해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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