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더십⑥…국제금융센터 지위 확립
리콴유 리더십⑥…국제금융센터 지위 확립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0.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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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지도층의 배척에 1965년 독립 선언…일본과도 경제적 협력

 

말레이시아연방 지도층은 합병 후 리콴유 배척운동(Crush Lee) 캠페인을 벌이고, 말레이·중국인 인종폭동을 유발시켜 치안을 맡은 말레이 군경이 중국계 시민들이 위축되도록 탄압하고, 리콴유 총리 제거를 획책했으나 리콴유의 출중한 책략과 영국의 협조로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리콴유(李光耀) 총리의 비상한 리더쉽과 인민행동당(PAP)의 활력 및 도덕성, 우세한 정책에 밀려 연방정치에서도 불리한 위치로 밀려날 것을 우려한 말레이시아 지도부는 싱가포르와 분리하기로 결정한다.

대부분 중국계 시민이 말레이 군경을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공산세력을 약화시킨 리콴유는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적 지지를 받으며 드디어 19658월 독립을 선언한다.

 

리콴유의 업적 가운데 손에 꼽을 대목은 싱가포르를 국제금융 센터로의 지위를 확립했다는 사실이다.

1968년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국제금융 센터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네덜란드인 경제고문 알버트 윈스미우스(Albert Winsemius)는 씨티은행 책임자와 상의해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금융시장 폐장 시간과 취리히 시장 개장 시간 사이에 7시간 공백이 있는 것을 이용해 싱가포르 금융시장을 구축해 세계 금융시장에 합류키로 결정하고 외환관리 통제를 폐지했다.

상가포르가 전형적 개도국이었지만 싱가포르 금융감독기구가 필요한 능력을 갖추었음을 세계에 과시하고 기술인력, 인프라, 쾌적한 생활환경을 갖추어 나갔다.

세계적 수준에 걸맞는 능률적이고 정직한 정부, 법치제도, 도덕 및 지적수준, 생활문화, 환경을 창설한다는 야심 차고 원대한 리콴유의 비전과 리더쉽은 독립 후 지금까지 싱가포르 정부와 국민이 이룬 엄청난 변혁과 성공의 초석이 되었다.

 

1990년대에 싱가포르는 뉴욕, 런던, 동경과 더불어 세계 4대 금융시장으로 성장하고 1997년 싱가포르 아시아 달러시장은 5천억 달러 규모로 싱가포르 국내시장 규모의 약 3배가 된다.

리콴유는 총리 퇴임후 1992년 미국 조지 슐츠 전국무장관 권유로 미국 JP모건(J.P. Morgan) 국제자문위원으로 참여, 전세계 금융산업, IT산업 발전상황을 깊숙히 익히게 된다. 1997년부터는 리콴유가 직접 세계적 전문가와 협의해 폐쇄적, 내향적 싱가포르 은행의 세계화를 위해 국유은행부터 외국 전문가를 영입하게 하고, 금융감독기구는 과감한 개방적 선진 기법을 도입하게 한다. 그 덕분에 1997년에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으나, 싱가포르 은행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금융센터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금융센터 /위키피디아

 

리콴유는 또 싱가포르를 아시아 지식정보산업 센터로 만든다는 전략을 세웠다.

1980년 일본 통산성(MITI)은 싱가포르가 지리상 전략적 위치와 환경에 놓여있는 잇점을 이용해 아시아 지식정보산업 센터역할을 맡고, 일본과 제휴할 것을 제의했다. 지식정보산업 센터로서의 싱가포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싱가포르인이 신뢰하고 의존할 수 있다는 평판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일본정부는 충고했다.

리콴유는 일본 정부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모든 학교, 대학에서 과학, 수학, 컴퓨터교육을 강화한다. 정부가 먼저 컴퓨터를 대대적으로 도입해 민간기업이 따르도록 하고 국민들에게 세게상 혜택을 부여하며 컴퓨터 사용을 장려해 지식정보산업 기반을 구축했다.

1980년 당시 일본정부는 북미·유럽 국가들의 철강, 자동차, 전자제품 보호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창의적 지식산업 육성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리콴유는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일본기업은 최첨단 기술 도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최첨단 기계를 다루는 근로자 훈련에 최우선적으로 투자함으로써 경영 기법과 더불어 근로자 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리콴유는 평가했다. 리콴유는 일본 정치인, 고위 관료, CEO, 기술자들과 계속만나 일본의 전략, 선진 경영기법과 발전하는 기술에 관해 끊임없이 배우고, 적절한 것은 싱가포르에 도입했다.

일본인 특유의 단결심, 기강, 지성, 근면성, 국가를 위한 유별난 희생 정신 때문에 일본은 무서운 생산력을 가지게 된다고 리콴유는 분석했다. 리콴유는 일본인 IQ가 서양인 보다 높다고 평가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바꾸는 일본인들은 앞으로도 남다른 노력을 계속할 것이고 어떠한 대재앙이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이라고 리콴유는 일본인을 높이 평가하고, 일본 점령 시대의 끔찍한 경험과 증오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일본인을 존경하고 감복한다고 공언했다. (리콴유의 이러한 생각에 후에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근무지로 싱가포르로 꼽았다.)

 

리콴유는 내부적으로 말레이족 빈민촌 문제를 해결했다.

오래 전부터 약 6만명 말레이족 빈민은 수도·전기가 없는 슬럼지역에 모여 살았다. 리콴유는 독립 직후 10년 후에는 빈민촌을 최고급 주택가로 바꾸고 고층아파트를 지어 그들을 이주시키기로 약속했다.

이주 시에는 말레이인들이 분산거주하도록 건물과 도로를 설계하고 동일아파트에 말레인이 25%를 넘지 않도록 해,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사는 버릇을 버리고 싱가포르 사회에 융합하도록 함으로써 인종분규의 불씨를 없앴다.

말레이학생의 수학 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으로 말레이 학생 장학회관을 지어 보충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말레이 학생의 대학 진학율은 7%(1987)에서 28%(1999)으로 껑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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