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투르크⑤…암적 존재로 전락한 예니체리
오스만투르크⑤…암적 존재로 전락한 예니체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6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교 집안서 소년 데려다 정예상비군 조직…말기에 술탄 폐위등 권력화

 

오스만투르크에는 데브시르메(Devşirme)라는 소년공양 제도가 있었다. 국가가 기독교 집안에서 남자 어린아이를 데려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정예군대로 양성하는 제도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군대가 예니체리(yeniçeri). 영어로는 Janissaries라 표현한다. ‘예니는 투르크어로 새로운’, ‘체리군대라는 뜻으로, 예니체리는 새로운 군대를 의미한다.

예니체리의 공격에 혼쭐이 난 유럽인들은 이슬람 국가가 기독교도들에게서 어린이를 납치해서 전쟁 도구로 사용하는 제도라고 악평한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어 최하위층으로 몰락한 기독교도들이 아이만이라도 출세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국가에 상납했고, 그들중 상당수가 고관에 올랐다는 점에서 서구적 시각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예니체리는 유목민족인 투르크족의 병력동원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유목민족은 집단적으로 이동하면서 남성뜰이 기르던 말을 끌고 나와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공성전에 약했고, 화기를 사용하는데 서툴렀다. 수시로 병력을 소집해야 했기 때문에 정규군화하기 어려웠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Murad I, 재위 1362~1389)는 점령한 기독교 지역에서 소년병들을 차출했다. 조건은 차출된 소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는 자기 종교를 믿는 자를 우대하면서 타종교 신앙자는 멸시하고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 상인들은 율법에 의해 유대인에게서 이자를 받지 못하므로 이슬람 상인과 상대하고 싶어 했다. 기독교도들은 같은 종교 신자를 노예를 만들 수 없었고, 이슬람 국가는 기독교 신자를 군대에 징집하지 않았다.

무라드 1세는 기독교도들 가운데 소년병을 모집해 군대로 차출했다. 오스만 제국이 등장한 초기에 서아나톨리아, 발칸 지역에는 기독교가 번성하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소년들을 차출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투르크어를 가르치고 군사훈련을 시켜 정예 상비군으로 만든 것이 예니체리다.

징집관이 마을을 돌아 다니며 10~20세 소년들을 모아 놓고 가장 뛰어난 소년을 선발해 데려갔다. 일부 기독교 부모들은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달라고 징집관에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발된 소년들은 수도나 지방 중심지로 데려가 국가가 마련한 정신교육과 신체교육, 군사훈련을 몇 년 동안 받도록 강요했다. 소년들은 총과 포 등 화약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예니체리는 명령에 의해 전진하고, 명령이 없으면 절대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예니체리가 등장해 서양인들을 놀라게 한 전투는 많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집트 맘루크 왕조 정복전, 헝가리 공격전, 두차례에 걸인 빈 공성전에서 예니체리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예니체리는 메흐테르(Mehter)라는 군악대를 운영했다. 세계 최초의 군악대라고 한다. 예니체리의 군악대가 북과 나팔, , 트라이앵글, 심벌즈를 연주하면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적진을 향해 공격했다. 총탄과 포탄이 쏟아져도 예니체리 행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적을 향해 돌진했고, 적은 그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예니체리 /위키피디아
예니체리 /위키피디아

 

예니체리는 전역하기 이전까지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 군인으로 살아야 했다. 봉급은 다른 병사에 비해 조금 더 많이 주었지만, 젊은 남성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도로 남아 있었으면 얻지 못할 사회적 지위와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졌다. 농촌의 기독교 소년들이 예니체리에 복무하면, 왕족의 지위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갈수 있었다. 예니체리는 제국 권력의 중요한 요소로, 지도부는 국가의 여러 최고위원회에 참석했다.

 

초기의 예니체리는 소수 정예부대로서의 특징을 잘 유지했고, 대원을 아주 제한해서 모집했다. 무라드 3세 이후 예니체리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 숫자가 10만을 넘어 섰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를 지나면서 예니체리의 기강도 해이해 지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예니체리들도 국가에 공헌한 만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자 결혼이 허용되었다. 결혼하면서 자식이 생기자 그들도 지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1637년에 기독교도들에게서 소년을 차출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자 예니체리의 세습이 더욱 심해졌다.

이후 예니체리는 초기의 강한 전투력을 잃게 된다. 1621년 폴란드와 맞설 때 예니체리는 12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패전하게 된다.

그러면서 예니체리의 상징인 엄격한 규율과 강한 훈련이 사라졌고, 한때 술탄의 근위대의 위치에서 술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예니체리는 이제 기득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스탄불과 지방의 주요도시에 배치되어 있었다. 권력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니체리는 술탄을 바꾸고 새로 옹립하는 킹메이커로 자처하게 되었다. 근위대로 복무하면서 술탄에 가장 가까이 있었고, 엘리트 군인으로 그들은 술탄을 즉위시키기도 하고 폐위시킬 능력도 가졌다.

1622, 1631년에는 누적되는 전비로 봉급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슐레이만 대제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고 적절한 금전적 보수가 나올때까지 그 아들 셀림이 술탄에 오르는 것도 방해했다. 예니체리들은 때로 이스탄불을 약탈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오스만 2(재위 1604~1622)는 예니체리들의 추태를 시정하기 위해 군사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했지만, 예니체리들이 선수를 쳐서 술탄을 살해해 버렸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오스만 2세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예니체리들은 술탄도 무시하고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예니체리들은 이권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소피아, 카이로, 다마스쿠스 등 주요도시에 주둔하던 예니체리들은 도시의 상인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예니체리들은 주둔 도시의 정육업자, 제방업자, 선주 등을 보호해 주고 댓가를 뜯었고, 일부는 전역하고 그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예니체리 군악대 /위키피디아
예니체리 군악대 /위키피디아

 

말기에 예니체리는 제국의 암적 존재가 되었다.

1804년 예니체리 군벌은 세르비아를 장악하고 술탄에 대항했다. 그들은 술탄이 세르비아 귀족들과 연합헤 예니체리를 토벌할 것을 우려해 귀족들을 처형했다. 기록에 따르면 예니체리는 세르비아 귀족들의 목을 잘라 공공장소에 내걸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 혁명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300년 동안 지배해온 세르비아 영토를 잃게 된다.

1807년 참다못해 술탄 셀림 3세가 예니체리를 없애려 했지만 오히려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어 암살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1826년에 술탄 셀림 3세의 사촌 동생인 마흐무드 2(Mahmud II)가 신식 군대를 동원해 예니체리를 해체시켰다. 예니체리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신식군대에 의해 패퇴했다. 이 전투에서 예니체리 4천명이 사살되었다. 생존자는 추방되거나 사형되었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사건은 '상서로운 사건'(Auspicious Incident)으로 명명되었다.

 

슐레이만 대제와 소년들 (1558) /위키피디아
슐레이만 대제와 소년들 (1558)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