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리더십⑦…우수한 인재 양성과 영입
리콴유 리더십⑦…우수한 인재 양성과 영입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0.1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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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장려정책 추진, 우수힌 인력 해외서 영입…창이공항 건설에 자부심

 

리콴유(李光耀)는 재능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영입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전체의 교육센터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일부)의 최우수 학생들은 대부분 싱가포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부모의 재능은 80%정도가 자녀에게 유전되고 교육과 환경에 따른 개발은 20% 정도란 조사결과에 착안해 리콴유는 고학력 여성 결혼율을 높이고 나아가 출산율도 높임으로써 우수한 유전자(gene)가 단절되지 않고 다음 세대에도 출생하도록 범국민운동을 주도했다. 이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과 조롱을 받고 큰 저항이 있었으나 리콴유 특유의 강한 신념으로 물러서지 않고 추진했다.

말레이, 인도, 중국계 남자들 모두가 자기보다 학력이 낮은 여자를 부인감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있는데다 중매결혼 관행으로 학력이 낮은 어머니들은 자기 학력 수준의 여자를 며느리 감으로 물색하는 경향(folly of marrying down)이 있었다.

리콴유는 대학졸업 여성의 결혼율과출산율을 높이도록 결혼 시 혜택과 세 명 이상 출산하면 특혜(좋은 학교 선택권, 세제상 혜택 등)를 주도록 했다. 예상을 뒤엎고 저학력 여성은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고학력 여성들이 반발하고 특혜를 거부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어리석은 관행을 고치게 되어 고학력 남녀 결혼비율은 38%(1982)에서 63%(1997)로 오르고, 대졸 여성의 저학력 남성과의 결혼비율도 올라가 고학력 여성 결혼율이 약 34%(1980)에서 대폭 높아진다.

참고로 1980년 통계를 보면, 대학 졸업 여성의 약 3분의2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남녀 결혼율은 34%였다. 고등교육 여성의 평균 자녀수는 1.6명이었고, 무교육 여성 평균 자녀수는 4.4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은 반아시아적 인상을 피하기 위해 아시아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펴게 되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도 따라서 같은 정책을 실시하게 되자 영어에 능통한 싱가포르 고학력자들 다수(5-10%)가 선진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에 리콴유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싱가포르로 유입되도록 싱가포르 대사관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유학중인 아시아 학생들에게 싱가포르 취업을 알선해 이민가는 수보다 3배 정도 많은 외국인을 영입했다.

또 중국·인도 학생들에게 싱가포르 대학 장학금을 줘 졸업 후 싱가포르에서 취업하도록 하고 인도동남아 우수인력 유입 특별 정책을 실시했다. 또 국제결혼 시 남자만 외국인 부인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1999년에 남녀 차별을 없애 여자도 외국인남편을 싱가포르에 데려올 수 있도록 개선했다. 싱가포르 초기 각료 10명 중 싱가포르에서 출생해 교육받은 사람은 리콴유 한명뿐이었다.

 

리콴유는 총리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비유했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 연주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프렌치 호른(french horn)같은 주요악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야만 연주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리콴유는 총리로서 각 정부부처에 대하여 정책과 주요 아슈(법치 질서 확립, 외교문제, 생활문화 고급화, 공항 신설 등)에 관해서만 관여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위키피디아
싱가포르 창이공항 /위키피디아

 

그의 업적 중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싱가포르항공의 경영개선과 창이공항 건설이다.

1970년 싱가포르항공이 기축항로인 런던-싱가포르-시드니 항로 운항을 시작하면서부터 리콴유는 경쟁력을 갖춘 흑자경영원칙을 강조했다. 싱가포르항공은 경영진과 노조가 합심 노력해 세계 최고의 항공사라는 평가를 받고 최고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1975년부터 현대적인 창이공항 건설을 시작해 세계 최고 수준의 공항을 건설했다. 관광대국을 지향해 공항과 시내진입로 경관을 아름답게 가꾸어 외국인이 싱가포르에 도착하면서부터 최대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는데, 리콴유는 지금까지도 제일 잘한 투자는 공항 건설이었다고 자부했다. “창이공항은 그후 8년간 연속적으로 세계 제1의 허브(hub) 공항으로 평가받았다.

 

리콴유는 법치문화 정착에 온 힘을 쏟았다.

일본점령 시대의 혹독한 생활과 2차대전 후 질서 재확립 시절의 경험은 범죄와 처벌에 대해 리콴유가 실용주의적 어프로치를 택하게 했다.

아시아인들이 배심원으로 범죄자에게 사형 평결을 꺼려 조그만 구실만 있으면 무죄평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배심원 제도(jury system)을 폐지했다. 인도에서도 실패를 경험한 후 폐지하가도 했다. 배심원 중 임산부가 있으면 살인죄 평결을 할 수 없었는데 이유는 사형평결을 내리면 저주받은 아이를 출산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도 식민 통치 시절에 싱가포르에서 이용했던 태형이 장기복역보다 효과적이므로 마약, 무기거래, 강간, 불법체류, 반달리즘에는 태형을 적용했다. 싱가포르인들은 복역보다 태형을 두려워 했고, 신문에 범인사진을 게재하는 것도 싫어했다.

1993년 미국인 15세 소년의 반달리즘에 대한 태형에 대해 국제적 비난이 많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의 사면요청이 있었으나 리콴유는 형평의 원칙을 고수, 태형에 처한다. 그 소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부친 폭행, 부탄가스중독등 범행을 계속했다.

권위 있는 국제기구는 싱가포르를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치안상태 세계 1, 조직 폭력배로 인한 경영손실이 별로 없는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리콴유는 26년간 총리로 재직한 후 199011월에 퇴임했다. 그후 2004년까지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맡았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맡았다. 그의 아들 리센룽(李显龙)20048월 싱가포르 3대 총리로 취임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99년 회고록 싱가포르 이야기(The Singapore Story)2000년 두 번째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을 출간했다. 20152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당해 323일 사망했다.

 

리콴유 총리 /위키피디아
리콴유 총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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