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일본의 것과 유사한 신라 고대 선박모형 출토
가야·일본의 것과 유사한 신라 고대 선박모형 출토
  • 아틀라스
  • 승인 2019.04.02 1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 월성 해자에서 발굴…목재 방패 2점, 목간 1점, 씨앗 63종도 확인

 

경주 월성 해자 발굴과정에서 의례용으로 사용하던 목제 배 1점이 출토되었다. 이번에 발굴된 신라의 배 모형은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선박 모형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 졌다고 문화재 전문가들은 밝혔다. 배 앞부분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은 가야와 일본의 모형과 비슷하다. 따라서 신라와 가야, 왜를 잇는 고대 선박 기술을 연구하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궁궐지였던 경주 월성을 발굴하던 중 해자 내부에서 의례에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最古)의 축소 모형(미니어처) 목재 배 1점이 발굴되었다고 2일 발표했다.

이번에 공개된 축소 모형 목재 배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확인된 모형 배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연구소는 밝혔다.

배 모형은 통나무배보다 발전된 형태로 실제 배와 같이 선수(뱃머리)와 선미(배꼬리)가 분명하게 표현된 준구조선(準構造船, 구조선으로 발전하기 앞선 초기 선박형태)으로, 크기는 약 40cm이다. 특히 배의 형태를 정교하게 모방하고 공을 들여 만들었는데, 안팎에서 불에 그슬리거나 탄 흔적이 확인되었다.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배의 사례로 보아 이번에 출토된 유물도 의례용으로 추정된다.

배는 약 5년생의 잣나무류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제작 연대는 4세기에서 5세기 초(350~367년 또는 380~424)로 산출된다.

축소 모형 배의 경우 일본에서 약 500여 점이 출토되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월성의 모형 배는 일본의 시즈오카현 야마노하나 유적에서 출토된 고분시대 중기(5세기)의 모형 배와 선수선미의 표현방식, 현측판(상부 구조물이 연결되는 부분)의 표현 방법 등이 매우 유사하다. 앞으로 양국의 배 만드는 방법과 기술의 이동 등 상호 영향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연구소측은 밝혔다.

 

월성 해자 출토 배 모양 목제품 /문화재청
월성 해자 출토 배 모양 목제품 /문화재청
월성해자 출토 배 모형의 선수(왼쪽) 선미(오른쪽) /문화재청
월성해자 출토 배 모형의 선수(왼쪽) 선미(오른쪽) /문화재청

 

일본 오사카 박물관에는 다카마와리 1호와 2호 고분에서 발견된 선형 하니와(토기)의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2호 고분의 모형은 선수와 선미가 상하 2단으로 분리된 구조선의 모양을 하고 있다.

오사카 박물관의 배 모형은 선수 부분에 물고기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파져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배 모형에도 선미인지 선수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물고기가 입을 벌리는 모양을 하고 있다.

고대선 모형은 왜 선수(이물)에 입을 벌린 모양의 공간을 만들었을까.

서울 호림박물관에 보관된 고대 토기 가운데 일본 다카마와리 고분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다. 호림박물관의 모형 배도 아랫 부분에 물고기가 입을 벌린 형상으로 파여 있다.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된 다카마와리 2호 고분의 선박 모형도와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호림박물관의 주형토기는 후기 가야 즉 5세기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만들어진 시기도 일본의 것과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주형토기가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호림박물관의 토기는 가야의 것으로 추정했다. 김해시청에 근무하는 송원영 학예연구사는 선수에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에 대해 파도를 헤쳐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배 측면에서 파도가 칠 때 공간이 있어 물이 빠져나가고, 힘을 덜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윗 것은 서울 호림미술관의 주형토기. 아랫것은 일본 다카마와리 2호고분에서 출토된 선형토기. 선수에 입을 벌린 모양을 한 점에서 닮았다. /사진제공=이효웅
위는 서울 호림미술관의 주형토기. 아래는 일본 다카마와리 2호고분에서 출토된 선형토기. 선수에 입을 벌린 모양을 한 점에서 닮았다. /사진제공=이효웅

 

김해와 오사카에서 출토된 배 모형은 모두 모두 고분에서 나왔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넌다고 믿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편안히 강을 건너라는 의미로 배 모양의 토기를 무덤에 넣어 주었다.

경주 월성도 신라 왕궁이었으므로, 해자에서 출토된 배 모형도 당대 최고 실력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들은 배를 타고 저승을 편하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토기는 무덤에서 나와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배 모형 이외에 4~5세기에 제작된 온전한 형태의 실물 방패(防牌) 2, 소규모 부대 지휘관 또는 군()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당주(幢主)와 곡물이 언급된 문서 목간 1점 등을 발굴했다.

방패는 손잡이가 있는 형태로 발견된 최초의 사례이며, 가장 온전한 실물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다. 2점 모두 수혈해자의 최하층에서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손잡이가 있고, 하나는 없는 형태다. 크기는 각각 가로세로가 14.4×73cm26.3×95.9cm이며, 두께는 1cm1.2cm이다. 표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기하학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붉은색검은색으로 채색했다. 또 일정한 간격의 구멍은 실과 같은 재료로 단단히 엮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실제 방어용 무기로 사용했거나, 수변 의례 시 의장용(儀裝用)으로 세워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방패의 재료는 몸체의 경우 잣나무류, 손잡이는 느티나무이며, 연대측정 결과, 손잡이 있는 방패는 340419, 손잡이가 없는 방패는 340411년으로 조사되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문화재청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문화재청

 

목간은 3면 전체에 묵서가 확인되었다. 주요 내용은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당주(幢主)가 보고하거나 받은 것이다. 6세기 금석문(단양 신라 적성비)에 나오는 지방관의 명칭인 당주가 목간에서 등장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또한, , , , 콩 등의 곡물이 차례로 등장하고 그 부피를 일(), (), ()과 같은 갖은자(숫자의 변경을 막기 위해 획이 많은 글자)로 표현했다. 앞서 안압지(현재 동궁과 월지) 목간(7~8세기)에서도 갖은자가 확인되었는데, 신라의 갖은자 사용 문화가 통일 이전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월성해자 내부에서는 이 외에도 호안(護岸) 목제 구조물과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목제 구조물은 해자 호안(기슭) 흙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시설로 수혈해자 북벽에 조성했다. 수혈해자 바닥을 파서 1.5m 간격으로 나무기둥(木柱)을 세우고 그 사이에는 판재(板材)로 연결했다.

최대 높이 3m인 나무기둥과 최대 7단의 판재가 남아 있어, 대규모 토목 공사가 삼국통일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의 목제 구조물 전체가 확인된 최초의 사례다.

 

월성 해자 출토 수정 원석 /문화재청
월성 해자 출토 수정 원석 /문화재청

 

또 해자 내부 흙을 1이하의 고운 체질로 걸러 총 63종의 신라의 씨앗과 열매도 확보했다. 국내 발굴조사 상 가장 많은 수량이다.

아울러 해자 주변의 넓은 범위에 분포했던 식물자료를 알아보기 위해 화분분석을 실시해 물 위의 가시연꽃, 물속에 살았던 수생식물(水生植物), 해자 외곽 소하천(발천 撥川)변의 느티나무 군락(群落) 등을 파악했다. 추후 경관 복원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 밖에 물의 흐름깊이수질을 알려주는 당시의 규조(珪藻, 물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를 분석해 해자에 담겼던 물의 정보도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신라인들이 가시연꽃이 가득 핀 해자를 보며 걷고, 느티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했을 5세기 무렵 신라 왕궁의 풍경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5세기 어느 여름 월성해자와 주변 (추정복원도) /문화재청
5세기 어느 여름 월성해자와 주변 (추정복원도) /문화재청

 

해자 내부에 6개월 전후의 어린 멧돼지뼈 26개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라인들이 어린개체를 식용(食用) 혹은 의례용으로 선호하였던 것을 시사한다. 또 삼국 시대 신라 왕경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던 곰뼈는 현재까지 15(최소 3개체)이 나왔는데, 앞발과 발꿈치 등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활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 외에도 2~3세기부터 분묘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는 수정(水晶)도 가공되지 않은 원석상태로 출토했고, 통일기 이후에 조성되어 사용된 3호 석축해자의 바닥 지점에서는 단조철부(鍛造鐵斧, 쇠도끼) 36점을 확인했다. 철부는 실제 사용 흔적이 있었으며, 석축해자 축조과정 혹은 의례 등과 관련해 한꺼번에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222)는 올해로 5년차이며, 지금은 성벽(A지구)과 건물지(C지구), 해자를 조사 중이다. 이제까지 월성 C지구에서는 건물지를 비롯한 내부 공간 활용 방식과 삼국~통일신라 시대에 걸친 층위별 유구 조성 양상이 확인되었다. 월성 해자는 물을 담아 성 안팎을 구분하면서 방어나 조경(造景)의 기능을 했으며, 다양한 의례가 이루어진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패와 목제 배 등 이번에 공개되는 유물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월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들은 오는 5일부터 62일까지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는 한성에서 만나는 신라 월성특별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