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나며…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나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2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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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이 공포의 장소 설계했나, 백주 대로에 하수인들이 그런 짓을 했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한강대로를 따라 내려오면 남영사거리, 그곳에서 100m 더 내려가 골목으로 들어가면 음산한 건물이 나온다. 19871월동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던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신했다.

 

위치 /네이버 지도
위치 /네이버 지도

 

어쩐지 들어가기가 싫었다. 시민에게 자유롭게 공개된 장소이긴 하지만, 과거의 치욕적인 시절이 떠올라 겉모습만 보고 돌아왔다. 백주의 대로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권에 반대했다고, 체제에 반대했다고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고 고문했다는 것인가.

건물 자체가 우중충했다. 언젠가 우연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된 전직 경찰관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30년이 더 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었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그냥 돌아선 적이 있다. 경찰들에겐 그곳에 근무하는 것이 출세의 길이었을 것이다. 정권에 잘 보이면 앞길이 보장되고, 그러려면 뭔가 실적을 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욕구가 못된 짓,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더 자행했던 것이 아닐까.

 

기념관에서 만든 팸플릿을 보니, 무지도 많은 고문사건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박종철 사건은 뉴스를 타면서 1987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된 사건이고, 그에 앞서 1980년 기자협회 집단구속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삼척-김제 고정간첩단 조작사건, 1985년 민청련·민추위 사건, 1987년 보도지침 사건 등으로 잡혀온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 일반 시민이 이곳에서 당했다. 고 김근태씨도 이곳에서 고문당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 /자료: 민주인권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 /자료: 민주인권기념관

 

민주인권기념관 팸플릿은 남영동 대공분실, 공포를 설계하다면서 건물 내부의 구조를 설명했다.

입구 정문은 두꺼운 철문으로 되어 있어 눈을 가린채 끌려오면 문을 여닫는 소리가 탱크 소리처럼 들렸던 곳이다. 건물 후문엔 연행자만 드나드는 전용 출입구가 있어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게 입구가 가려져 있었다. 1층에서 5층까지 회전계단이 이어졌는데, 창이 없어 도중에 빠져 나갈수 없고, 눈을 가린채 오르면 방향과 공간 감각을 잃어 공포감이 더욱 고조된다. 5층에는 좁은 복도에 16개 조사실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모든 출입문은 맞은 편에서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사실 내부에는 욕조가 방마다 설치되어 있다. 창문은 머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좁고 깊게 설치되었다. 스위치는 조사실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데, 불을 켜고 끄는 것과 불빛의 세기가 모두 문밖에서 설치되도록 조절되어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 /자료: 민주인권기념관
옛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 /자료: 민주인권기념관

 

유신 시절인 1976년 내무장관 김치열에 의해 발주된 이 건물의 설계자가 그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씨라는 사실이 놀랍다. 김수근씨는 이토록 정밀한 설계를 하면서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를 몰랐던 것일까. 그가 설계했다는 서울의 명건축물을 보면서 역겨움이 느껴진다.

1983년에는 5층 건물을 7층으로 증축했다. 그만큼 고문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일까. 정권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일까. 박종철 사건이 있은후 1991년 경찰청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5년 경찰청 인권센터로, 201812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사진: 김현민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민주인권기념관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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