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 네그라서 네루다를 만나다…강낙규의 칠례 여행②
이슬라 네그라서 네루다를 만나다…강낙규의 칠례 여행②
  • 강낙규 전 기술보증기금 전무
  • 승인 2019.10.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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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민중운동가, 이곳에 잠들다…스페인에서 추방, 라틴아메리카로

 

2. 발파라이소(Valparaiso 천국의 계곡)

 

칠레 최대의 항구도시로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환태평양 불의 고리(Ring of Fire)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이 잦다. 인류가 기록한 가장 큰 규모의 지진도 칠레에서 일어났으며 규모는 9.5였다. 1730년 발파라이소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그때부터 언덕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1906년과 1971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겪은 후 내진설계를 강화한다.

 

<콘셉시온 언덕(Cerro Concepcion 수태의 언덕) >

 

1883년 운행을 시작한 아센소르 콘셉시온(엘리베이터)을 타고 언덕으로 올라간다. 곳곳에 벽화와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을 칠한 작은 집들 사이로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화려한 붉은 꽃 사이로 그려진 그리스 아르테미스 여신, 네 개의 눈과 여럿 해골을 가진 태고의 원주민 신(), 알 파치노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노랑머리 소녀, 북치는 인디오 무당, 바다 속 잠수부와 해룡 등 주제와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벽화를 구경하는 것이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벽화가 오래되어 색이 바라면 새로 그리는데 발파라이소에 등록된 화가만이 그릴 수 있다. 벽화를 그리는 것이 화가로서도 큰 영광이라 대기한 화가의 수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벽화를 배경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고, 라틴댄스를 추는 젊은이들도 있다. 땡땡땡 종이 울리면서 1톤 정도의 작은 화물차가 나타난다. 트럭 화물칸에 앉은 청년이 종을 치면서 뭐라고 소리친다. LPG 가스를 팔고 있다. 마치 40여 년 전 두부장수가 종을 치면서 두부사려하고 소리 지르는 것 같다. Fauna Restaurent 에서 식사를 한다. 야외 테라스에서 발파라이소 항구와 시내가 활짝 보인다. 전망이 최고다. 맥주한 잔을 마시는데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이 시원하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이튿날 빨래를 맡기러 세탁소에 갔다가 김준범PD를 만난다. 모방송국 PD를 하다가 지금은 칠레에 무역과 관련하여 법인장으로 근무한다. 칠레 상원의원실과도 함께 일을 한다.

김준범PD에 의하면 200441일 한국과 칠레가 FTA를 체결한 후 한국자동차의 칠레 점유율이 90%까지 올라갔다. 중국이 200511, 일본이 20073월 각각 FTA를 체결하자 한국 자동차의 점유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직 자동차점유율 1위는 GM 대우, 2위는 현대, 3위는 기아인데 한국자동차의 성장률은 11%인데 반해 중국자동차는 36%, 곧 가솔린과 디젤차는 중국에 뒤처질 것으로 예상한다. 산티아고 버스도 중국 BYD로 넘어 갔다. 전기자동차나 수소차등 새로운 기술이 아니면 중국세상으로 바뀐다고 걱정이 크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현대가 3세가 마약으로 구속됐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피말리는 세계 자동차 경쟁에서 온 국민이 응원을 보내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PD는 집으로 저녁식사를 초대했다. 오랜만에 현대식 아파트 발코니에서 부부가 함께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신다. 멀리 발파라이소 바다가 보인다. 그동안 여행 중 참았던 담배를 기어이 한 개피 피우고 만다. 한국인은 누구라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준다고 한다. 발파라이소 여행할 분은 연락 주시기를.

 

< 하늘 박물관(Museo a Cielo De Valparaiso) >

 

별도의 박물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야외박물관이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20여명의 발파라이소 지역 대학생들이 벽과 지붕, 골목을 캠퍼스로 다양한 그림을 그린 독특한 공간이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 네루다의 집 '라 세바스티아나'(La Sebastiana) >

 

조용히 글쓰기에 적합하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 너무 높거나 낮지도 않은 집, 외곽에 있지만 항상 이웃과 교감할 수 있는 위치, 독립적이지만 상업시설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집’. 네루다가 1959년 친구 사라 비알과 마리 마르트너에게 부탁했던 그 집이다. 스페인 건축가 세바스티안의 이름을 따서 집 이름을 붙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Il Postino 우편배달부)의 촬영지다. 네루다가 사용했던 타자기와 식탁, 유리잔, 옛 지도, 항구의 오래된 그림과 월트 휘트먼의 멋진 초상화로 집을 장식했다. 집의 창문 중 일부는 배의 채광창처럼 만들었다. 가장 큰 테라스는 식당으로 개조했다. 초상화에 나오는 노동자 중 한 명이 네루다의 아버지다. 1973년 군사 쿠데타 이후 약탈을 당했던 '라 세바스티아나'1991년에 복원되었으며, 그해 12월 박물관으로 개관한다.

창밖으로 태평양이 시원하게 보인다.

네루다는 '라 세바스티아나를 위해 시를 쓴다.

나는 집을 짓고 / 공기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 그리고 공중에 깃발을 올렸고 / 공중에서, 별에서, 빛에서 / 어둠에서..’

네루다의 집은 산티아고(라 차스코나 La Chascona), 발파라이소(라 세바스티아나 La Sebastiana), 이슬라 네그라 등 3곳인데 지금은 모두 박물관이다. 이중에서 단연 이슬라 네그라가 최고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검은 섬) >

 

네루다의 집이외에는 집이 한 채 밖에 없을 정도로 벽촌이었던 이슬라 네그라가 네루다로 인해 칠레사람들의 순례지가 됐다. ‘네루다의 집은 입구부터 줄이 100미터이상 길게 섰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부터 고등학생까지 단체 관람객과 전 세계에서 네루다를 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 초등학생이 우리를 보며 치노(Chino) 치노하기에 ! 코레아노라고 했더니 ! BTS!’ 하면서 순식간에 50여명의 학생이 함께 사진을 찍자며 모여 든다. 질서 정연하던 줄이 한 순간에 흐트러진다. 그때 칠레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며 화난 표정을 짓는다. 상황을 설명하고, 아내도 선생이라고 하니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짓더니 칠레 선생님도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를 맨 앞줄로 데려가서 네루다의 집으로 들여보내준다. 거의 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계속 된다.

 

네루다는 바다를 좋아해서 네루다의 집은 바다와 관련된 온갖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박물관의 주제도 바다. 배와 닻과 키, 건물외벽도 물고기로 장식했다. 앞뜰에는 네루다의 상징물인 물고기 조형물이 있고 나무로 된 다윗의 별에는 여섯 개의 종이 매달려 있다. 뒤뜰에는 기차모양의 조각품이 있는데 철도원이었던 아버지가 근무하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 내부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각종 조개류와 술병, 병속에 든 돛단배, 항해용 망원경, 곤충표본 등 다양한 수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박물관 뜰에 네루다는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슬라 네그라검은 섬이란 의미지만 사실 섬이 아니라 검은 바위다. 그 바위 위에 네루다의 두상이 세워져 있다. 친근한 동네 아저씨모습으로 조각되어있다. 모래사장에는 남녀고등학생이 배구를 한다. 파도소리와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네루다는 또 다른 시를 쓰고 있겠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네루다의 이슬라 네그라 시절을 상상하며 쓴 소설이다. 피노체트가 쿠데타가 일으키자 독일로 망명해서 이 소설을 쓴다. 소설의 배경은 피노체트의 등장 이전 혼란스러운 칠레의 정치적인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로 만든 <일 포스티노>에서는 배경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으로 바꾸고, 소설과는 다르게 시인을 통해 성장해가는 순수한 시골청년의 이야기에 맞춰져있다. 주인공은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라는 가상의 인물이다. 순박한 시골청년이 메타포를 통해 유추하고 추리하는 것을 배우고, 이로써 사고와 학습을 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마리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의 우편배달부다. 네루다에게 오는 많은 편지들을 배달하면서 네루다로부터 메타포를 배우며 그의 삶은 크게 바뀐다. 메타포의 매력만큼 다가선 매혹적인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데 메타포는 그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는 마리오의 질문에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감상해보게" 라고 답한다. 네루다가 아내를 위해 쓴 시를 베껴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에게 보내자 네루다는 꾸짖는다. 이에 마리오는 당당하게 "시는 그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 이라고 항변한다. 네루다는 수긍한다. 보르헤스가 <삐에르 모나드,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가르쳤던, 소설의 주인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는 사실을 마리오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마리오는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로 사고를 확장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위협을 무릅쓰고 네루다에게 전보를 들려주고자 했던 모습은 소극적인 소시민이 아니라 진일보한 인간으로서의 마리오로 변신한다.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우정을 그린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연기한 마시모 트로이시(Massimo Troissi)는 영화 촬영 당시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촬영을 위해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촬영이 종료 된지 12시간 후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일 포스티노의 엔딩장면에 나오는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 중 시()란 제목의 한 구절을 읊어 보자.

 

그래 그 무렵이었다..시가 /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 침묵도 아니었다. /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 밤의 가지들로부터 /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 격렬한 불길 속에서 /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

 

잉크보다 피에 가까운 시인, 20세기 최고의 시인, 시간을 정복하고 순간을 포착해 물질 속에 그 감정을 영속 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무한한 인간.

시가 적힌 노트를 내동댕이친 후 불태워버린 아버지의 반대에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이름 대신 체코의 시인 네루다를 필명으로 사용 한다.

초기의 에로티시즘에서 초현실주의 세계, 민중에 대한 애틋한 정치, 말년의 동양적 달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시를 쓴다.

1924<20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1933<지상의 거처>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상실감으로 참담한 좌절을 노래한다. 자기 고립적 체험으로 절대 고독의 시기다.

스페인 내전 중 친구 극작가 로르까가 의문의 암살을 당하자, 반프랑코 성명서에 서명하고 반파시스트 대열에 가담한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화물선을 개조한 선박으로 2,000여명의 지식인과 민중 운동가를 해외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한다.

1943년 멕시코영사를 사임하고 귀국길에 마추픽추를 방문한다, 잉카 유적과의 만남은 그의 인식이 라틴아메리카로 확장되는 결정적 동기가 된다. 1950<모두의 노래>는 네루다가 라틴아메리카로 역사인식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정치시의 완결판이다. 체 게바라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책이 괴테와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

1945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북부 탄광지대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1948년 파업 중인 광부를 탄압하자 나는 고발한다는 상원연설로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말을 타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망명한다.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 멕시코로 망명생활을 이어나가다, 1952년 검거령이 철회되자 이슬라 네그라에 정착한다.

1964<이슬라 네그라의 추억>은 서정적 자서전으로 사랑에서부터 정치적 고발까지 깊은 사색을 노래한다.

1969년 공산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사회당 후보 아옌데와 후보단일화로 아옌데를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가 사망하자 병이 악화되어 12일 만에 사망한다. 산티아고 집은 약탈당하고 책은 불태워진다. 이슬라 네그라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피노체트정권은 근처 공동묘지에 묻는다. 이때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배웅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하는데 공식적으로 최초의 시위로 기록된다. 이후 네루다는 피노체트 독재시절 내내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된다. 1990년 민선정부가 들어서자 비로써 이슬라 네그라에 묻힌다.

 

남영주 사진작가
남영주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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