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슈리성에 드리운 슬픈 류큐국 역사
불탄 슈리성에 드리운 슬픈 류큐국 역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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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건물은 불탔지만, 잃어버린 왕국의 유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살아 있어

 

3년전인 201611월초 오키나와(沖繩) 섬의 슈리성(首里城)을 둘러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이번에 슈리성 주요건물이 화마로 소실되었다는 뉴스에 남달리 안타까움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슈리성을 꼭 한번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오키나와의 독립왕국이었던 류큐국(琉球國)의 역사에도 나름 관심이 있었다.

이번에 화마로 소실된 곳은 슈리성의 중심건물인 세이덴(正殿)과 북전(北殿), 남전(南殿) 등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불탄 건물들은 옛 류큐왕국의 임금이 국사를 논의하고 중국 칙사를 접대하고 왕실 가족이 거주하던 공간이다. 류큐국의 역사가 불탔다고 할수 있다.

 

이번에 불탄 슈리성 세이덴(正殿)의 모습 /김현민
이번에 불탄 슈리성 세이덴(正殿)의 모습 /김현민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면 류큐국의 역사가 불탄 것은 아니다. 류큐국을 멸망시킨 일본국이 복원한 건축물이 불탄 것이다.

우리 언론들은 세계문화유산이 불탔다고 제목으로 달았다. 하지만 불탄 정전과 궁궐건물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슈리성의 정전과 목조건물들은 19455월 태평양전쟁 중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소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오키나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46천여명이 전사하고 55천여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은 군인 10만명과 주민 12만명이 사망했다.(일본측 추산)

일본군은 슈리성 지하에 참호를 파고 총사령부를 두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점령국인 류큐국 유적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곳 지하에 사령부를 두면 미군이 폭격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수만명의 죽음을 치르면서 미국은 슈리성을 그냥 두지 않았다. 525일부터 태평양상에 떠 있는 미시시피호에서 숱한 포격이 가해졌고, 527일 정전과 부속건물들이 불탔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상륙하는 과정에서 치러진 격렬한 전투로 슈리성과 인근마을, 역대 류큐 국왕의 보물, 문서들이 파괴되었다. 패전후에는 무너진 슈리성 터에 류큐 대학이 세워지면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헐리거나 묻혀 버렸다.

미군 점령기에 슈레이몬(守礼門) 등 일부 건축물이 재건되었고, 본격적으로 슈리성 복원이 추진된 것은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하면서부터였다. 일본 정부는 류큐 대학을 이전하고 1980년에 슈리성 재건계획을 세워 복원을 시작했다. 슈리성 유구 발굴과 성곽 재건, 정전 건축등 일련의 복원을 마친 것은 1992년이었다.

슈리성 복원을 마치고 일본은 1990년대 후반에 슈리성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1950년 이후 지어진 건축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를 파괴한 댓가다.

다만, 1950년 이전에 축조된 구스코 성터와 궁궐터, 남아 있는 유물 등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했다. 이번에 불탄 정전과 부속건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세계문화유신인 그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국내 언론들이 세계문화유산이 불탔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 정부가 화마로 소실된 후 복원한 남대문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원된 건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이번에 불탄 정전과 부속건물은 복원된 건물이므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슈리성 제일 관문 간카이몬(歓會門). /김현민
슈리성 제일 관문 간카이몬(歓會門). /김현민

 

슈리성은 13~14세기 중산(中山), 남산(南山), 북산(北山)의 세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오키나와를 통일한 중산국의 왕성으로 지어졌다. 삼산(三山)을 통일한 쇼()씨 왕조는 슈리성을 류큐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슈리성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소실되기 이전에도 1453, 1660, 1709년에도 소실된 적이 있으며, 최근 불탄 목조건물은 1715년에 재건축한 슈리성을 복원한 것이었다.

 

류큐국은 중국의 명·청에 조공했고, 조선과도 조공을 통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류큐국이 일본국의 억압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조선 침공을 계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의 각 번()에 전쟁물자 조달을 명했고, 독립왕국이던 류큐국에도 큐슈 남단의 사쓰마(薩摩)를 통해 병력 15천을 동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도요토미 막부는 지시를 바꾸어 류큐가 멀리 있는 나라이고, 일본군의 전략에 익숙치 않다는 이유로 병력 7천명이 먹을 식량 11,250석과 황금 8천냥을 요구했다.

류큐의 쇼네이(尚寧)왕은 이를 거부하면서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도요토미가 조선과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하지만 쇼네이 국왕은 도요토미 막부의 보복이 두려워 요구한 식량의 절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물러섰다.

이게 발단이었다. 도요토미 막부가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새 막부를 구성했지만, 구원(舊怨)을 잊지 않았다.

16089월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사신을 류큐에 보내 도쿠가와 막부의 초빙에 응하라고 설득했지만, 류큐 왕실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사신으로 온 승려를 욕을 보였다. 결국 도쿠가는 류큐를 정벌하라는 어지를 내렸고,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씨는 이를 받아 류큐 정벌에 나섰다.

사쓰마의 병력은 군인 3천명, 전함 100척이었다. 160951일 사쓰마군은 나하항에 진입해 5일후에 슈리성을 접수했다. 사쓰마군은 소네이 국왕은 물론 류큐 군신 100명을 배에 태워 본토로 압송했다. 슈리성을 함락한지 12일째 되는 517일이었다.

이듬해인 16108월 쇼네이왕과 신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도쿠가와는 쇼네이를 너그러이 살려주었다. 류큐 국왕 일행은 사쓰마로 끌려갔다.

사쓰마에서 쇼네이왕과 고관들은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사쓰마는 국왕 석방 조건으로 류큐가 영원히 사쓰마의 번속(속국)이 되어야 하며, 류큐왕이 사쓰마에 반할 때 신하와 백성들이 이에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때 류큐의 재상 정형(鄭逈)은 사쓰마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조건을 결코 수락할수 없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자 사쓰마 번주는 쇼네이왕과 왕자,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형을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뎐져 삶아 죽여 버렸다. 쇼네이 국왕은 기겁을 하고 사쓰마의 조건을 수락했다.

쇼네이 국왕 일행은 일본 열도를 26개월간 끌려 다니다가 1611년 슈리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류큐국은 형식적으로 중국에 조공하는 독립국을 자처했지만, 사실상 사쓰마번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류큐 북방의 섬 다섯 개를 사쓰마에 내줬다. 이때 내준 오키나와 열도의 북쪽 섬들은 지금도 가고시마 현에 속해 있다.

 

슈리성 성벽. 복원 흔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슈리성 성벽. 복원 흔적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류큐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한 해는 1879년이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를 발표하고, 전국의 각 번을 해체했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왕국의 마지막 국왕이 된 쇼타이(尙泰)왕에게 왕국을 해체하고 일본의 일개 현()이 될 것을 요구했다.

메이지 정부의 핵심 세력들은 사쓰마 출신들이었다. 이듬해인 1872년 사쓰마 출신의 오쿠보 도사미치(大久保利通)는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일본 귀족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며, 국왕을 번왕으로 격하한다고 통보했다. 쇼타이 국왕이 이 조치를 거부했다. 그러자 오쿠보는 류큐 정승들을 에도로 불러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이에 쇼타이 국왕은 1876년 세명의 밀사를 청나라 실세인 리훙장(李鴻章) 북양대신에게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리홍장은 도와주지 않았다.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력 소모가 심했고, 러시아가 흑룡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어 일본국과 대립할 여력이 없었다. 리홍장이 거절하자 세 밀사중 하나인 임세공(林世功)은 남쪽나라 류큐를 향해 세 번 절한 뒤 단도를 꺼내 자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18793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으로 전환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일본국은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를 류큐 처분관으로 임명해 500명의 군사를 주어 류큐로 급파했다. 마쓰다가 류큐에 도착한 날은 327. 일본군은 무력으로 슈리성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고 포고했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왕 쇼타이와 왕자를 비롯, 왕족들을 도쿄로 압송했다. 이로써 450년 류큐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이번에 불탄 슈리성 정전과 부속건물들은 일본국이 한때 독립왕국이었던 류큐국이 자국영토임을 보여주기 위해 복원한 건물이다. 그 건물은 불탔지만, 그 아래 본래의 터와 유물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잃어버린 왕국의 혼을 지키고 있다.

 

류큐국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왕. /위키피디아
류큐국의 마지막 국왕, 쇼타이(尙泰)왕.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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