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낙산길을 걷다…총무당, 원불교 옛터 등
한양도성 낙산길을 걷다…총무당, 원불교 옛터 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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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구간에 완만한 경사…도심을 구경 할수 있고, 역사도 돌아보는 산책코스

 

한양도성을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조선 왕실이 왜 이 성을 쌓았을까 하는 것이다. 수도 한양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서라면 손쉽게 목책으로 만들고, 높은 봉우리에 망대를 세우면 되었을 터였다.

조선 역사 오백년 가운데 한양도성을 방벽으로 외적과 싸운 적이 없다. 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떠나기 바빴고, 호란이 발발했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도성에서 싸워 군주로서의 의무를 다한 임금은 없다. 이괄의 난 때에도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쳤다.

그러면 왜 이 긴 돌담을 쌓았을까. 군주의 두려움에서였을까. 도시 미관을 위해 건축했나. 한양도성은 전투를 위한 성()이라기보다 경계의 의미를 갖는 담(wall)이었을 뿐이다. 도망칠 때 넘기 쉽게 하는 그런 담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한양도성은 서울을 예스럽게 해주는 건축물로서 의미를 갖는다. 한양도성길은 걷기 좋게 잘 가꾸어져 있다. 선조들이 고생해서 만든 담벼락을 걷을 때엔 역사도 생각하게 된다. 그냥 걸어도 좋다. 특히 짧은 가을을 즐기기엔 서울도성 길만한 게 없다.

정부는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했다. 관리들은 그런 것을 등재하면 대단한 것으로 안다. 자기네 치적으로 내세운다. 한 번도 전투에 사용해 보지 않은 돌담이 있으니, 문화유산으로라도 활용해보자는 심산이다.

 

우리는 낙산 구간을 걸었다. 동대문에서 시작해 낙산 정상부로 올라간 다음 내려오는 길이다. 북악산 구간이나 인왕산 구간에 비해 완만하고 구간도 짧아 한두시간 짬을 내 걸을 수 있는 단기 코스다.

동대문을 건너 편에서 성곽이 시작된다.

 

동대문쪽 성곽 입구의 각자성석 /김현민
동대문쪽 성곽 입구의 각자성석 /김현민

 

성곽 초입에 한양도성 각자성석이 길을 멈추게 한다. 도성을 만들 때 구간을 정해 책임자를 정했다는 내용이다. 그 책임자는 자기 이름이 돌에 새겨져 후대에 오래 남아 영광이겠지만, 그 아래서 일하던 뭇 백성들은 책임량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해설자료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에 있는 각자 성석은 숙종 32(1706) 4월에 훈련도감 관리 한필영(韓弼榮)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成世珏), 2구간은 전수선(全守善), 3구간은 유제한(劉濟漢)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吳有善)이며 1구간은 …… 이렇게 새겨진 각자성석은 도성 전체에 280개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낙산 한양도성길 /김현민
낙산 한양도성길 /김현민

 

곧이어 서울시에서 만든 한양도성 박물관이 높다랗게 서 있다. 촌스럽다. 서울시에 땅이 있고, 예산이 넉넉하니 일단 지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어쩐지 도성 박물관 냄새가 나지 않아 들르지 않았다. 언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자료를 예산 펑펑 써가며 만들어 놓았겠지.

낙산 공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젊은 아베크 족을 위한 카페 들이 눈에 띤다. 이화 벽화마을도 나온다. 외국인들이 많이 산책을 한다.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도성을 산책하면서 서울 도심을 볼수 있는 코스여서 외국인들에게 낙산 순성길은 인기가 많다고 한다. 밤에는 서울 야경을 볼수 있다.

 

낙산 정상부에서 북악산 방향으로 본 서울 도심 /김현민
낙산 정상부에서 북악산 방향으로 본 서울 도심 /김현민

 

낙산 꼭대기에서 방향을 틀어 한성대쪽 내리막으로 갔다. 성곽 길이 너무 단조로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삼군부 총무당 /김현민
삼군부 총무당 /김현민

 

약간은 가파른듯한 길을 잠시 내려가면 삼군부 총무당이 나온다.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한 삼군부의 본전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때에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관아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다. 원래 자리는 광화문 남쪽 정부종합청사 자리였는데, 1930년대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앞면 7·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에 1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현판 글씨는 조선말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대표였던 신헌(申櫶)이 썼다.

지금으로 치면 육군본부 정도의 관청인데 너무 왜소하다. 조선의 군대가 허약했음을 보여주는듯하다.

삼군부는 총무당(總武堂),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 세 개의 기관을 말하는데, 덕의당은 없어지고 청헌당은 공릉 육사 교정으로 옮기고 총무당만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원불교 서울교당 옛터 표지석 /김현민
원불교 서울교당 옛터 표지석 /김현민

 

조금더 내려가면 원불교 서울교당 옛터가 나온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少太山朴重彬大宗師, 1891~1943)라는 분이 1916년 깨달음을 얻은 후 전라남도 영광에서 시작되었다. 8년후 1924년에 서울에 올라와 제자들을 모았고, 낙산 밖 창신동에서 교당을 만들었다가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곳 마을 이름이 앵두나무골이라고 한다. 6백여평 대지에 12칸의 기와집이었는데, 1946년 용산 용광사를 인수해 이전했다. 이 곳은 그후 서울시에서 고아원 등으로 사용하다 공원이 되었다.

 

길을 줄곧 내려가면 삼선동이 나오고 자그마한 재래시장이 나온다. 간식거리들이 행인들을 유혹한다. 천원짜리로 살수 있는 것도 이제 거의 없는데, 이곳에서 몇 개 사서 요기했다.

더 내려가면 성북천이 나오고 지하철 역을 만나 도심의 공간으로 들어갈수 있다.

 

산책 코스 /다음 지도
산책 코스 /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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