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루프 가문②…창업자 프리드리히의 실패
독일 크루프 가문②…창업자 프리드리히의 실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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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거듭하며 ‘주강의 비밀’ 찾아내…시대에 너무 앞서 나간 비극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크루프(Friedrich Krupp, 1787~1826)는 독일 크루프 강철왕국의 창업자다. 그는 철강회사를 창업했지만 말아먹고 파산 상태에서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주강의 비밀은 후손들이 독일제국 최대철강회사로 키우는데 씨앗이요 밑거름이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1787년 아버지 페터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어머니 페트로넬라 사이에 다섯 아이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덟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고 프리드리히는 할머니 헬레네 아말라에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아 섬유와 염색, 정육점, 복권업무, 담배 가게를 다양하게 운영했다. 대농장도 보유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다.

할머니는 1800년에 제련소를 하나 인수했고, 프리드리히에게 제련소 일을 맡겼다. 그 제련소는 화덕, , 프라이팬, 냄비, 금속판, 작은 철제품을 생산했다. 10대의 나이에 제련소를 맡은 프리드리히는 장사꾼이라기보다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철공소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는 기술자들과 협동으로 기술개발에 주력해 기계 가마를 개발했다. 그 가마는 당대 산업기술이 가장 발달한 영국에서만 제조되었는데, 프리드리히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자신에 넘쳤다.

하지만 생산된 주물은 팔리지 않았고, 팔려도 대금인도가 지연되었다. 회사의 적자는 누적되었고, 할머니 헬레나는 손자에게서 공장을 빼앗아 팔아버렸다. 첫 번째 사업실패였다.

 

1810년 할머니가 가문의 재산을 몽땅 프리드리히에게 넘겨 준 후 사망했다. 돈이 생기고 간섭할 사람이 없어지자, 프리드리히는 또 사업 욕심에 빠졌다. 그는 영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주강(鑄鋼, cast steel)의 비밀을 찾아 나섰다. 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절대로 외국에 주강 기술이 넘어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안을 지켰다. 기술을 훔칠수 없다면 개발하는 방법 밖에 없다.

18111120일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할머니 집 뒤편에 자그마한 공장을 차렸다. 나이 스물넷. 요즘으로 치면 벤처사업가였다. 당시 독일의 철강기술은 나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었다. 그는 강철, 강한 철제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시대는 나폴레옹 전쟁기였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해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영국 제품은 자신이 관할하는 영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프로이센과 에센시 등 독일 제후국들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프리드리히에게 기회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에서 들어오던 주강을 대체생산하면 4천 프랑의 상금을 주겠다며 철강업자들을 독려했다. 이 거액의 상금이 프리드리히를 자극했다.

프리드리히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동업했지만, 사기를 당했다.

첫 번째는 장교 출신인 케헬 형제들이다. 케헬 형제들은 주강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회사 경영에 참여했지만, 기술은커녕 봉급만 축냈다. 그들을 쫓아냈지만, 사업은 기울어 가기만 했다. 형제들에게 돈을 빌려 가까스로 회사를 유지했다.

두 번째 동업자는 기병대장 출신인 프리드리히 니콜라이였다. 니콜라이는 황제로부터 엘베와 라인강 사이에 강철 생산 독점권을 받았다는 허가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기였다. 동업자 사이에 의견이 벌어지고 서로 비난하게 되었다. 결국 둘은 갈라지고 법정 소송에 휘말렸다. 그런 가운데 회사는 직원들에게 봉급도 주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마냥 손을 내미니 친척들도 더 이상 프리드리히를 외면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대륙봉쇄령이 풀렸다. 상금을 줄 사람이 사라지고, 영국의 우수한 철강제품이 독일로 밀려 들어왔다. 프리드리히는 정신적 고통과 과다한 업무로 병에 걸렸다.

그런 가운데 1816년 크루프 철강공장은 제련강(smelted steel)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더 사업을 계속할 힘을 잃었다. 돈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 그해 7월 그는 일단 공장가동을 중단했다. 두 번째 실패였다.

 

공장내 관리자 가옥. ‘크루프의 본가’라 불린다. /위키피디아
공장내 관리자 가옥. ‘크루프의 본가’라 불린다. /위키피디아

 

건강이 회복되었을 무렵인 181610월에 그토록 기다리던 주문이 외국에서 들어왔다. 또 할머니가 매각한, 자신의 손때가 묻었던 철강회사에서도 그의 제품을 사겠다고 했다.

그는 다시 돈을 구해 공장을 돌렸다. 이 공장에서는 주강이 체계적으로 생산되었다. 훗날 크푸르 철강회사가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를 시작한 공장의 시초였다.

베를린의 화폐 조폐소와 뒤셀도르프의 조폐소도 그의 견본품에 대해 호평을 했다. 그의 제품이 다른 회사 제품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구와 같은 제품도 제법 팔려 나갔다. 프리드리히는 회사 매출이 증가하는 것에 맞춰 회사를 늘렸으면 성공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이 조금 팔린다는데 그는 커다란 착각을 했다. 그의 꿈이 너무나 컸다. 그는 회사 설비를 대대적으로 증설했다. 독일 조폐창은 물론 러시아 조폐창도 장악할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러시아 차르와 프로이센 국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공장을 지을 돈을 구하지 못했다. 프로이센 정부를 상대로 대부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주문량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또다시 공장이 돌다가 서다가를 계속했다. 친척집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 페트로넬라가 한번 도와주고, 장인이 한번 도와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장인은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어 왔다. 에센 시내에 있던 양옥집도 장인에게 넘겨 빚을 갚고, 공장 안에 있던 관리인 가옥으로 이사했다. 이 관리인 가옥이 후에 크루프의 본가로 숭배되는 곳이다.

직원들은 거의 모두 해고했다. 에센시는 그를 세금 명부에서 삭제했다.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독일 제조업자들이 영국 제조업자에게 뒤지지 않는 게 나의 소망이다. 내가 이런 목적에 기여할수 있는 일이라면 내 이익과 관계 없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업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바람에 자신의 목적조차 놓치게 만들었다.

1825108일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2년간 투병한 수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39세였다.

 

크루프 창업자 프리드리히와 아내 테레사 빌헬미의 비석 /위키피디아
크루프 창업자 프리드리히와 아내 테레사 빌헬미의 비석 /위키피디아

 

그의 미망인 테레사 빌헬미(Therese Wilhelmi)는 남편의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남편은 일찍 사망했지만 주강의 비밀도 함께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주강 제조의 비밀은 장남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들 알프레드는 아버지 밑에서 일했고, 공장을 대표해서 책임을 맡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장남과 함께 프리드리히 크루프의 회사를 계속해서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죽었을 때 장남 알프레트(Alfred)14살이었다. 이 어린 소년에게 크루프 철강회사가 맡겨진 것이다. 2대째 회사 경영을 맡은 어린 알프레트는 크루프를 독일 최고의 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아들 대에 과실을 따게 된 것이다.

미국 언론인 로버트 뮬렌은 크루프의 창업자 프리드리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크루프는 너무 일찍 강철과 대량생산의 성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런 시대는 4반세기 뒤에야 왔다. 그는 새로운 산업의 여러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했지만, 재정, 판매, 그리고 생산문제에 실패했다. 독일은 그가 머리 속에 그렸던 산업의 부흥과 동떨어져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당대에 주목받지 못한 선구자의 비극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그의 무모함과 환상의 열매를 수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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