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루프 가문④…3대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독일 크루프 가문④…3대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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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유보트 등 무기 생산에 주력…스캔들에 휘말리며 의문의 죽음

 

크루프 철강왕국의 2대이자 사실상 창업자인 알프레트 크루프(Alfred Krupp)1887년 사망하자, 그의 외아들인 프리드리히 알프레트(Friedrich Alfred Krupp, 1854~1902)가 사업을 이었다. 아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아버지가 75세까지 장수하는 바람에 기업 총수가 된 나이는 33세였다.

할아버지 프리드리히와 아버지 알프레트의 이름을 모두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1902년 의문의 사망으로, 기업 경영기간이 15년에 불과하다. 3대 크루프는 60년 이상 기업을 일군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연약하고 감수성이 강했다. 그는 즐거운 청소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정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했다. 대학에 진학해 학과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버지가 결정했다. 그는 아버지를 늘 존경하고 우러러 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중압감에 제약을 받았다고 전기 작가들은 말한다. 아버지는 쉽사리 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는 강인한 성격의 아버지를 닮지 않고, 온화한 신사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기업주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아버지가 크루프를 유럽 제일의 회사로 키워 놓은 덕분에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

미국의 초기 철도산업은 크루프의 강철에 의해 개척되었다. 크루프가 생산하는 엄청난 양의 강철과 레일이 미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에 카네기 강철(Carnegie Steel)이 등장해 강철 생산을 확대하면서 크루프의 미국 수출이 줄어들었다. 3대 크루프는 일반 강철 생산에서 무기 생산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아버지 알프레트 시절에 대포 생산이 25%, 일반 강철 생산이 75%였는데, 아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시기엔 일반 강철 생산이 25%, 군수용 무기 생산이 75%로 역전되었다.

알프레트 프리드리히는 에센시의 울타리를 넘어섰다. 해안가 킬(Kiel) 항구의 게르마니아 아 조선소를 인수해 선박건조에 뛰어들었고, 라인강변에 제련공장을 건설하고, 마그데부르크의 분탄공장을 인수했다. 그의 경영기간 15년동안 종업원수는 21천명에서 43천명으로 두배 이상 증가했다.

 

크루프사가 제작한 유보트 /위키피디아
크루프사가 제작한 유보트 /위키피디아

 

그는 무기 생산에 주력하는 과정에서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Wilhelm II)와 막역한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황제의 요청에 따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에센시를 장악하고 있는 사회민주당 후보를 꺾기 위해 그는 1887, 1893년 선거에서 황제 지지정당 후보로 출마해 두차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출마는 근본적으로 사업의 이해와 연관되어 있었다. 빌헬름 2세의 국가주의 정치를 지지해 무기사업의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의 보수적 국가관은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진보적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그를 희화한 삽화가 그려지고, 그의 적들은 그를 자본주의의 꼭두각시라고 조롱했다. 나아가 대포와 장갑차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1년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단체 창설에 참여하고, 친정부 신문을 창간하는데 재정적 지원을 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드는 신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1890년 크루프는 니켈강(nickel steel) 개발에 성공했다. 이 합금강은 기존 강철보다 강했기 때문에 함정 갑판과 장갑차 두께를 얇게 할수 있었다. 니켈강으로 만든 장갑차에 스웨덴 알프레드 노벨의 화약을 사용하는 포를 장착하면서 독일의 장갑차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게 되었다. 1893년에는 디젤 기관이 개발되어 장갑차에 장착되었다. 킬의 조선소에서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유보트(U-boat) 잠수정이 개발되었다.

 

이탈리아 카프리 섬의 크루프 길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카프리 섬의 크루프 길 /위키피디아

 

그는 아버지와 달리 사회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생학(eugenics)에 깊은 관심을 갖고 관련 학문에 많은 비용을 지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해양학에 빠져들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해양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탈리아를 자주 여행했다. 그게 그의 비극을 초래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서부 해안에 있는 관광지 카프리섬(island of Capri)에서 심해 연구에 몰두했으며, 나폴리 동물연구소에 협동작업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 동굴 하나를 사들였다.

1898년부터 4년간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카프리섬을 오갔다. 1년중 몇 달은 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에서 독일의 저명한 해양학자, 철학자들을 불러 토론하고 연구했다. 섬에 머물 때, 회사의 중요한 일은 편지를 통해 결정되었다. 그가 나폴리 앞바다의 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언론들은 그에 관해 추측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1902년 나폴리의 한 신문이 3대 크루프에 관한 기시를 실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가 동성연애를 했으며, 미성년 남자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이탈리아의 관청은 그에게 섬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이 독일에 전해졌다.

19021115일 사회민주당 성향의 잡지 포어베르츠(Vorwärts)가 프리드리히 알프레드가 동성애에 빠져 현지에서 소년과 성년 남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인 마르가레테(Margarethe von Ende)는 보도가 나오자, 황급히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달려가 그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황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부인은 심한 정신적 충격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급히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황제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와의 면회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9021122일 하인이 침대에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날 오후 그는 사망했다. 자살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문도 나왔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지 몇 시간만에 프리드리히 알프레트의 관 두껑이 봉해졌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크루프 경영을 한지 불과 15년만의 일이다.

장례식 날에 황제도 참석해 운구 행렬의 뒤를 따랐다. 빌헬름 2세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신의 친구를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후계자의 문제가 등장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두지 못했다. 그는 아내 마르가레테와 사이에 베르타(Bertha)와 바르바라라는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 베르타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16살에 불과했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는 살아 있을 때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장녀 베르타가 성년이 되면 유산을 물려받도록 정했다. 따라서 부인 마르가레테가 딸이 성장할 때까지 크루프의 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1903년 크루프사는 프리드리히 알프레트의 유언에 따라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후계자 문제는 황제 빌헬름 2세가 해결했다. 황제는 베르타의 사위가 될 사람에게 쿠르프의 성()을 이어갈수 있다는 칙령을 내렸다.

유일한 상속녀 베르타 쿠르프는 1906년 외교관 출신인 구스타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Gustav von Bohlen und Halbach)와 결혼해 남편에게 회사경영을 위탁했다. 이로써 구스타프는 제4대 크루프 가문을 잇게 된다.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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