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루프 가문⑤…4대 구스타프와 1차 대전
독일 크루프 가문⑤…4대 구스타프와 1차 대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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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교서로 사위 구스타프가 크루프 성 획득…1차 대전에 독일 무기제조창 역할

 

190211, 독일 강철제국 크푸프의 3대 경영자 프리드리히 알프레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장녀 베르타(Bertha)가 상속녀가 되었다. 크루프는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총주식 2억 마르크중 베르타가 16천 마르크를 보유하고, 나머지 4천마르크는 가족들에게 나눠줬다. 사실상 베르타 1인의 회사였고, 주식은 거래소에서 거래되지도 않았다.

빌핼름 2(Wilhelm II) 황제는 당시 독일 철강·기계산업을 독점하다시 한 거대 기업을 여인의 손에 맡겨두는 게 두려웠다. 바야흐로 유럽은 국수주의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던 시기였고, 열강들은 치열하게 군비 경쟁을 하던 시절이었다. 발칸 반도에선 전운이 감돌았고,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제(Kaiser)는 자신에게 충성하고 독일민족의 위대한 정신에 충만한 남자를 베르타의 남편으로 구해줄 것을 생각했다.

베르타는 어머니 마르가레테(Margarethe)와 여동생과 함께 로마를 방문했다. 바티칸 대사관에 근무하던 잘 생긴 한 외교관이 그들을 접견하고 여행을 안내했다. 그가 구스타프였다. 베르타는 구스타프와 사랑에 빠졌고,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구스타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Gustav von Bohlen und Halbach, 1870~1950)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활약한 독일계 미국인 헨리 볼렌(Henry Bohlen)의 손자로, 황제파이자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당시의 기록자들이나 현재의 저술가들은 황제가 측근을 동원해 두 사람의 결합을 추진했다고 보고 있다. 베르타는 나이 20, 성년이 되었다. 구스타프는 베르타보다 나이가 16살 많았다. 둘은 황실의 허가를 얻어 결혼을 하게 된다.

 

크루프의 4대 경영자 구스타프와 상속녀 베르타 /위키피디아
크루프의 4대 경영자 구스타프와 상속녀 베르타 /위키피디아

 

19061015일 에센시 크루프 저택에서 열린 구스타프와 베르타의 결혼식에는 빌헬름 2세가 참석했다. 신랑은 옥좌에 앉은 황제에게 일의 목적은 공공의 행복이어야 한다는 크루프 가문의 좌우명을 맹세했다.

황제는 부부에게 교시를 내렸다. “의무가 없으면 권리도 생각할수 없다. ‘의무라고 새겨진 현판을 금으로 만들어 현관문에 달도록 하시오.” 황제는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스런 베르타여, 당신들의 결혼은 범인들의 결혼과 다르다. 독일 제국을 위해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공장을 유지하고, 생산력 뿐 아니라 성능에서도 다른 나라보다 앞선 수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황제는 부부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또다른 특별 교서를 내렸다. “구스타프와 그후 공장을 이어받는 모든 남자 후계자는 크루프의 성()을 하사하노라는 내용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황제가 신랑에게 신부 가문의 성을 내린 것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거니와,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이리하여, 구스타프는 본래의 성 앞에 크루프 성을 붙여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Gustav Krupp von Bohlen und Halbach)라는 긴 이름을 가지며 크루프 가문의 일원이 된다. 황제는 구스타프를 선택해 남성 대가 끊어진 크루프 가문에 데릴사위를 보낸 것이다. 결과적이지만, 구스타프를 보냈기에 독일 제국은 1차 대전을 전개할 자신감을 얻었다고도 할수 있다.

구스타프와 베르트는 결혼 후 8명의 자녀를 낳는데, 이중 후계자인 알프리드(Alfried)만이 크루프 성을 앞에 붙였고, 나머지 7명의 자녀는 폰 볼렌 운트 할바흐(von Bohlen und Halbach)의 가족 성만 사용하게 된다.

 

구스타프는 크루프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크루프 가문의 사람보다 더 크루프적이었다. 외교관 출신은 그는 뛰어난 사업감각을 발휘했다. 1911년 구스타프는 함(Hamm) 선재공장을 인수해 와이어를 생산했고, 스테인리스 강(stainless steel)을 제조했다. 무기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쿠르프가 생산한 무기의 50%는 독일에서 구매되었고, 나머지는 52개국에 판매되었다. 크루프는 해외에도 투자를 해 국제적인 기업들과 카르텔을 형성했다.

1913년에 크루프의 무기기술이 해외에 유출된 사건이 발생해 황제가 장교와 관련자들을 대거 체포했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자신은 면책하고 이사 한사람만 해임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1914년 세르비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저격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연합과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사이에 전운이 도는 가운데 구스타프는 죽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별장을 잽싸게 사들였다.

 

1차 대전에 사용된 크루프 생산 곡사포 빅베르타 /위키피디아
1차 대전에 사용된 크루프 생산 곡사포 빅베르타 /위키피디아

 

사라예보 사건이 결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구스타프는 전 공장을 무기생산에 집중해 크루프의 공장들은 독일군의 무기제조창으로 변신했다. 전쟁은 양측면이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의 무기 구매가 급증했지만,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연합국으로부터의 수요가 끊겼다. 포탄의 뇌관(shell fuses)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던 영국 비커스(Vickers)사는 크루프에 주어야 할 돈을 떼먹었다. 그럼에도 독일과 동맹국의 무기 수요가 폭증하는 바람에 해외에서의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1차 대전중에 크루프사가 만든 무기 중 유명한 것은 94톤 짜리 곡사포와 철도포였다. 크루프는 곡사포를 아내의 이름에서 따 빅 베르타’(Big Bertha)라 불렀고, 철도포를 파리 공격용으로 만들었다 해서 파리 건(Paris Gun)이라 했다. 두 대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기에다 크루프는 독일의 잠수정 유보트(U-boats)를 제작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독일 제국은 벨기에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은 강제징용으로 크루프 무기생산라인에 투입했다. 이는 헤이그 국제협약 위반이었다. 구스타프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크루프의 무기생산을 독려했고, 국제협약 같은 건 무시했다. 그는 연합군의 해상 봉쇄를 뚫기 위해 화물 잠수함을 만들어 해군에 공급했다.

 

크루프 생산 장거리포 파리건 /위키피디아
크루프 생산 장거리포 파리건 /위키피디아

 

1918년 독일이 패전함으로써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 황제는 폐위되었다. 구스타프는 전범으로 몰렸지만 재판을 받지 않았다. 다행히 구스타프는 감옥에 가지 않고, 크루프 경영에 몰두할수 있었다.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독일의 무장해제를 위해 크루프의 무기생산을 금지했다. 구스타프는 언제 무기를 생산했느냐는 듯, 공장을 민수용으로 돌렸다. 그는 우리는 모든 것을 생산한다”(Wir machen alles!)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것저것 생산했지만, 전후 몇 년간 회사의 적자를 피할수 없었다. 직원들을 7만명이나 해고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전국의 공장을 휘어잡고 폭동을 일으켰지만, 구스타프는 근로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고 복지를 넉넉하게 베풀면서 폭동의 소용돌이를 넘겼다. 크루프는 전쟁 부상자를 위한 치아, 인조 턱 등도 개발하고 독일 철도건설에 자재도 공급하며 회사를 유지했지만, 무기를 팔지 못하는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1920년 노동자들의 급진적인 소요가 확산되면서 루르 지역에 카프 폭동(Kapp Putsch)이 이러나고 그후 조직된 루르 적군파들이 프랑스가 설정한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좌익세력들은 에센시의 크루프 공장을 점거하고 독립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자 바이마르 정부는 질서회복을 요청하며 군대를 투입했다.

사태가 악화하자 영국이 크루프 공장에 대한 감독권을 장악하고 크루프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전쟁 보상비 조건으로 크르푸의 설비를 뜯어갔다. 크루프 강철제국은 무너지기 직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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