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후⑥…석유의 이해관계
9/11 그후⑥…석유의 이해관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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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석유가격 안정 위해 사우디에 증산 요구…이라크 석유에 눈독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 이탈리아 북부 휴양도시 산 레모에 영국과 프랑스 외교관이 만나 패전국인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어떻게 나눠먹을지를 논의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미국은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다. 미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동로마제국을 붕괴시킨 700년 역사의 투르크 제국 영토를 분할 통치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때 미국에 메소포타미아의 유전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탠더드 오일 오브 뉴저지의 A. C. 베드포드 회장이었다. 당시 미국 석유산업을 독점했던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독과점방지법에 의해 수십 개로 쪼개졌고, 뉴저지주에 본부를 둔 스탠더드 오일의 한 갈래가 오늘날 엑슨-모빌의 원조다.

베드포드 회장은 산 레모에서 벌어진 영-불 협상의 결과를 친구로부터 전해듣고 국무부를 찾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석유를 장악한 자가 세계를 차지할 것이며, 세계 최대의 석유매장량을 확보한 메소포타미아 문제 해결에 미국이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미 국무부는 중동 문제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안으로 취급해나갔다.

베드포드가 주목한 그 일대에 지금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독립국가가 건설됐고, 그가 예언했듯이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석유분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베드포드 회장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전투적 부족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사담 후세인과 같은 사람이 그가 오래전에 정확히 예측한 인물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석유는 산업 활동 뿐아니라 개인의 일상 생활에도 꼭 필요한 존재다.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20세기는 물론 21세기에도 진행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은 말의 힘을 이용한 기마병과 기름을 원료로 하는 전차의 싸움에서 기름의 우위가 인정된 전쟁이었고, 2차 대전에 앞서 미국은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1990~91년의 걸프전은 서방세계가 쿠웨이트 석유를 보호하기 위해 침략자 이라크를 축출하는 전쟁이었다.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주목한 것은 세계 2위 매장량을 보유한 이라크였다. 러시아가 산악지대의 소국 체첸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곳을 지나는 송유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중국이 신장성 분리주의자를 탄압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석유가 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다. 미국이 알카에다의 은신처이자 탈레반 정권의 근거지였던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은 그곳에 송유관이 관통하는 석유의 이해가 개입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제석유시장은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엑슨, 모빌, , BP, 걸프, 텍사코, 소칼등 미국과 유럽의 7대 메이저에 의해 장악됐다. 그러던 것이 중동 산유국들이 자국 유전을 국유화하면서 오일 쇼크가 벌어졌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라는 국제카르텔에 의해 공급자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려는 것은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테러의 배후에 있는 (evil)’을 처단하고, 세계 2위 매장량의 유전을 차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게 된다.

 

자료: 위키피디아
자료: 위키피디아

 

1970년대에 두차례에 걸쳐 오일 쇼크를 겪은후 미국은 중동 산유국에 대한 원유 의존을 줄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취했다. 첫번째가 중동에 대한 원유 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석유개발을 늘리는 길이다.

1980년대에 영국 북해에 대규모 유전이 개발됐고, 남미 베네주엘라, 구소련 지역에 유전이 속속 확인되면서 중동의 세계 석유 시장 점유율이 낮아졌다. 이 틈을 이용해 미국은 중동에 대한 원유 의존을 줄이고, 새로이 개발된 비() OPEC 지역에서 석유 수입을 늘렸다. 그 결과 페르시아 걸프지역에서의 원유수입 비중이 1977년에 전체 27.8%에서 2001년엔 23.5%로 줄어들었다. 미국이 중동산 석유 수입 비중을 줄이려고 30년 동안 노력했지만, 수입 비중을 4% 포인트 줄이는데 그치고 여전히 중동 석유는 미국 수입 원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수입원으로 확보한 베네주엘라도 2002년말에서 해를 넘겨 벌어진 장기 총파업의 여파로 공급이 중단됨으로써 해외 석유 수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절감했다.

그러나 국내 석유개발도 여의치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에너지 개발 정책을 제시하고, 취임과 동시에 알래스카와 멕시코만 연안의 유전 개발을 서둘렀다. 알래스카의 북극 자연공원 일대엔 유전 개발을 끝내고, 땅에 파이프를 박아 두껑만 막아 놓은 상태로 파이프라인을 연결, 알래스카와 캐나다지역을 거쳐 본토로 수송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여기에 환경보호론자들이 개입했다. 그들은 툰드라 동토 지역에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면 한대 수림이 파괴되고, 그곳을 뛰노는 순록의 생태계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멕시코만 지역의 유전도 마찬가지 논리다. 해양 오염은 물론 수산자원의 생태계가 깨진다는 것이다. 환경론자들은 민주당을 등에 업고 의회를 통해 제지하니,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도 밀어부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선거도 의식해야 하고, 취임초기에 팽팽한 공화민주당의 의석 구조에서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표가 있었다.

결국 미국은 다시 중동으로 집중했다. 중동에는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적이 있질 않는가. 바로 이라크였다.

 

국제 석유시장의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사우디 아라비아가 쥐고 있었다. 사우디는 세계 최대의 수출국인데다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했고, 중동의 산유국에겐 이슬람의 중심지 메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간단한 통계를 보자. 2000년 현재 전세계에 확인된 석유매장량의 63%가 중동 지역에 집중돼 있었고, 이중 25%(2,610억 배럴)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매장돼 있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단일 국가로 세계 석유시장을 좌지우지할 충분한 매장량을 확보했다. 생산시설도 사우디가 최고였다. 사우디는 하루에 1,000만 배럴의 생산시설을 확보했고, 2000년에는 이중 700만 배럴을 생산했다. 300만 배럴은 언제라도 석유시장에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할 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여유 물량이었다. 국제석유시장에서 100만 배럴이 공급 과잉되어도 선물시장의 유가가 배럴당 5~10달러 떨어지는 속성이 있다. 사우디가 하루 300만 배럴의 여유물량으로 세계 석유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9·11 이후 유가가 급락한 것도 사우디가 놀고 있는 시설을 가동해, 국제석유시장의 패닉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세계 석유시장 주도권은 물량 부족시 공급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데서만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아랍국내 경쟁국 또는 비아랍 산유국이 배당된 생산물량(쿼터)를 넘어 생산하거나 수출할 때 이를 처벌하는 기능을 한다. 외교적, 정치적으로 제제하는 것이 아니라 석유를 통해 제제한다. 예를 들어 1990대에 베네주엘라가 석유 생산을 하루 230만 배럴에서 300만 배럴로 늘리려고 했을 때 사우디는 베네주엘라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 산유국들은 OPEC이 정한 쿼터량보다 많이 생산해 팔고 싶어했다. 하지만 사우디는 국제 유가를 배럴당 22~30달러의 폭(밴드) 내에서 유지하기 위해 수급을 조절했다. 너무 비싸면 수요국들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고, 너무 싸면 산유국들의 수익이 줄어든다. 1998년에는 베네주엘라가 생산량을 늘린데다 아시아 경제 위기로 수요가 급감, 국제 석유시장의 수요 공급에 불균형이 커졌다. 이때 사우디가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지지해야 하는데도 불구, 생산량을 늘려버렸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달러대로 떨어졌다. 사우디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생산을 늘린 것은 베네주엘라로 하여금 항복 선언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유가가 하락하면 사우디도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지만, 경제력이 취약한 베네주엘라가 더 큰 타격을 입는다. 마침내 베네주엘라는 사우디의 OPEC 주도권을 인정하고, 본래 합의한 쿼터로 되돌아갔다.

 

사우디와 미국은 공생관계에 있었다. 미국은 석유재벌인 사우디 왕가를 보호하기 위해 사막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사우디는 미국에 싸고 안정적인 원유를 공급했다. 미국과 사우디의 결합은 미국의 중동 지배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중동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9·11 테러의 주범과 알카에다 테러리스트가 사우디 국적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사우디 왕가에 반대하는 반정부 세력이 반미 구호를 내걸고 미국을 타깃으로 삼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우디 왕가도 민주주의적 선거를 무시하는 반시대적 왕정주의를 유지했고, 미국은 국가 이익을 위해 반민주적 국가를 지원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아울러 사우디에 민주주의를 요구할 경우 반정부 세력에 반미 세력이 침투할 경우를 두려워 했다. 아랍권 테러 세력의 끊임 없는 공격 목표가 되면서도 미국이 사우디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은 이런 모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우디의 반대급부는 석유였다. 사우디는 미국에 하루 17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기로 장기공급계약을 맺고 있다. 이는 미국의 하루 평균 수입물량 1,000만 배럴의 17%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우디가 미국에 수출하는 원유가격은 유럽이나 아시아에 하는 가격보다 배럴당 1달러 쌌다. 국제관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경제력이 큰 나라에 원유를 디스카운트해줌으로써 사우디는 그 대가로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왕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연간으로 사우디가 미국에 할인해주는 석유 가격은 62,000만 달러 규모에 이른다. 이 정도면 미국 주둔비용을 충분히 지불하고도 남는다. 사우디는 이를 이용해 코소보 사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간여했다.

 

9·11 이후 미국은 중동 문제에 집중했다.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사우디등 중동 아랍국에서 배출됐고,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테러의 근원인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이슬람 과격파들의 연대를 끊어야 했다. 게다가 수십년간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라크와 이란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중동은 테러 세력의 근원지인 동시에 세계 최대 석유 생산지라는 특수성이 존재했다. 테러를 쫓는다고 사우디 왕가에 지나친 압력을 넣을 경우 석유시장이 위태롭고, 석유만 신경 쓰다 보면 테러리스트를 양산시키는 모순을 안게 되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과 석유 시장 확보라는 두 이슈를 저울질하며 중동문제에 접근했다.

 

테러 직후 중동사태 악화에 대한 우려로 국제원유가격은 순식간에 배럴당 30달러를 넘어섰다. 그것을 막아준 것은 사우디였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은신처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위해 중동에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이스라엘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공격을 중단할 것과 사우디 아라비아에 국제석유시장 안정을 위해 원유 생산을 늘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는 부시 행정부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렸으나,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가 이뤄졌다. 사우디아라비아도 갈기가 치솟은 사자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석유 생산을 늘렸다. 테러 후 며칠만에 국제유가가 배럴당 20 달러 근처로 급락한 것은 사우디가 미국의 요구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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