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루프 가문⑥…나치에 협력, 독일 재무장
독일 크루프 가문⑥…나치에 협력, 독일 재무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6 1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히틀러에 협조, 전쟁무기 생산에 박차…외국인 강제징용으로 전범기업 몰려

 

1923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인쇄기를 풀가동해 마르크를 찍어냈고, 역사상 초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때 크루프사는 자체적으로 에센시에 한해 사용되는 로컬화폐 크루프마르크(Kruppmark)를 발행했다. 크루프가 발행한 비법정 통화는 당시 독일에서 유일하게 안정된 통화로 꼽혔다.

그해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이 배상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군대를 투입해 루르지역을 점령했다. 프랑스 군당국은 크루프 경영에 관한 모든 것을 일일이 감독했다.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에 대한 독일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구스타프 크루프는 경영자대표자 협의회를 주도하며 프랑스군이 공장 점령을 시도하면 공장 사이렌을 울려 파업을 유도하자고 결의했다.

1923323일 프랑스 군대가 크루프 화물차 제조공장에 들이닥쳤다. 공장 사이렌이 울렸고, 크루프 노동자들은 공장을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다. 폭력적 행동은 없었지만, 노동자들의 격앙된 시위에 프랑스 군인들이 차고로 쫓기면서 기관총을 난사했고, 1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크루프 노동자들의 시위가 격화되었고, 점령군은 프랑스 군대의 안전에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로 크루프 임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사건 당시에 구스타프는 베를린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에센에서 열린 재판에서 2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 부인 베르타(Bertha)가 감옥에 면화를 갔을 때 그는 이제 나를 진짜 크루프 사람이라 불러도 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크루프 가문의 사위로 들어와 빌헬름 2세 황제에 의해 크루프 성을 받도록 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감옥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티칸과 스페인 국왕의 중재로 7개월만에 풀려났다. 구스타프는 이 일로 인해 독일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4대 경영자 구스타프 크루프 (1931)/위키피디아
4대 경영자 구스타프 크루프 (1931)/위키피디아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Gustav Krupp von Bohlen und Halbach)라는 긴 이름의 4대 경영자는 왕당파, 즉 황제파 인물이었다. 비록 빌헬름 2세가 1차 대전 패전을 책임지고 퇴위했지만, 그는 언젠가 황실이 복위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그는 바람 부는대로 깃발을 거는 사람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협조했고, 나치에도 부역했다.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크루프의 무기 생산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무기를 만들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Reichswehr)에게 공급했다. 또 조약을 우회해 스웨덴의 군수업체 보포르(Bofors)를 인수해 해외에서 무기를 생산했다. 스웨덴에서 생산된 무기는 터키에 판매되었다. 또 무기 기술자들을 해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기술개발에 주력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언젠가 독일이 재무장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23년에는 네덜란드 조선소를 인수해 잠수정을 생산했다. 네덜란드산 잠수정은 네덜란드와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일본 등 중립국에 팔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요제프 비르트(Joseph Wirth) 총리가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연합국 감시를 피해 대포와 탱크를 만들어 공급했다. 구스타프가 공장에서 베르사이유 조약을 위반하며 5년간 무기를 생산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크루프는 1926년 코발트와 텅스텐을 섞은 초경합금(Cemented carbide)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1929년엔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 상층부에 미국산을 제치고 크루프의 철강재가 사용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는 구스타프 (1940)/위키피디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는 구스타프 (1940)/위키피디아

 

구스타프는 처음에 히틀러의 나치당에 반대했다. 그 스스로가 황제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절반쯤 사회주의 성향을 띤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t. 나치)가 체질상 맞지 않았다. 히틀러가 자신과 다른 하층계급 출신이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구스타프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기 바로 전날에 히틀러를 선택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념에 충실한 인물은 아니었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권력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유연하게 협조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 위대한 나치’(super Nazi) 운운하며 아부를 떨었다.

그에 비해 철강분야 경쟁자였던 프리츠 티센(Fritz Thyssen)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반대하는 전보를 히틀러의 부하 헤르만 괴링에게 보내면서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달아났다.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장면 같다. 하지만 티센은 나치에 의해 국유화된다. 2차 대전후 티센과 크루프가 합병해 티센크루프가 되는데, 로고 첫머리에 티센이 나오고 크루프가 뒤로 밀린 것은 역사의 원죄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크르푸의 탱크 '타이거 I' 생산라인 /위키피디아
크루프의 탱크 '타이거 I' 생산라인 /위키피디아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재무장에 나섰다. 크루프에겐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이기도 했다. 구스타프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였건, 그 스스로 정치적 대의명분에 집착하지 않았건, 히틀러에 충성을 하게 된다. 히틀러는 반대급부로 기업 국유화를 포기하고 구스타프의 경영권을 인정한다.

크루프 가문의 정통혈족인 부인 베르타는 단한번 히틀러를 비틀었다. 히틀러가 에센의 크루프 저택을 방문했을 때, 베르타는 두통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장녀에게 달갑지 않는 손님을 영접하라고 했다. 하지만 몇 년후 그녀도 히틀러가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고, 히틀러와 함께 저택 정원을 산책해야 했다.

구스타프의 나치 충성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1939년 히틀러에게 보낸 인사말에서 다시 지상군, 함대, 그리고 공군을 위해 일하는 것이 크루프의 첫 번째 임무라고 말했다.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아들프 히틀러가 제국의 운명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 모두가 준비해 왔던 시간, 우리가 크루프가 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아들프 히틀러, 승리를 위해.”

2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 1940년 그는 크루프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작업하는 노동자도 전투하는 병사들과 똑깉은 권리와 의무, 그리고 승리에 대한 똑같은 의지를 갖고 망치, , 제도판, 필기도구를 든채 전선의 병사들 앞에서 행진합시다. 크루프 공장은 일꾼들의 작업을 통해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히틀러 만세.”

1939년 당시 에센의 크루프 직원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무기산업에 종사했다. 히틀러는 구스타프를 군수산업의 지도자로 임명하고 나치 국가관의 바탕 위에서 저돌적으로 일하겠다는 서약서의 서명을 받았다. 크루프는 전쟁물자 생산의 선봉에 섰고,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2차 대전에 무기를 생산하면서 크루프의 근로자 수는 35천명에서 112천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크루프는 전범 기업이 되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크루프에서 일한 노동자들 가운데 수만명이 점령지에서 끌려온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전쟁포로, 나치 강제노동수용소 수감자였다. 다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인이었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도 있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전후 연합군의 기록에 따르면, 고문과 학대는 일상적이었다.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징용자는 몇 시간 동안 좁은 금속제 옷장에 가두는 벌을 받았다. 에센에는 전쟁포로와 강제노동자들의 숙소가 360개나 되었다. 당시 전쟁포로와 강제노역자가 없었더라면 크루프 공장은 생산이 지속될수 없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정예요원을 빼고는 강제징용과 포로를 동원해 공장을 돌렸다.

 

구스타프와 아내 베르타, 그리고 가족 /위키피디아
구스타프와 아내 베르타, 그리고 가족 /위키피디아

 

하지만 구스타프는 2차 대전 기간 대부분을 병상에 있었다. 그는 1939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1941년에는 신체 일부에 마비현상이 생기기 시작해 침대에 드러 누웠다. 치매현상까지 생겼다. 서둘러 후계자를 세워야 했다. 장남이자 크루프 성()이 부여된 알프리트(Alfried)를 경영전면에 내세웠다. 1943년이었다. 알프리트는 이미 1938년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이때 히틀러는 크루프에게 특혜를 베풀었다. 히틀러는 크루프 법안(Lex Krupp)을 만들어 크루프에 한해 주식회사를 개인회사로 전환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구스타프가 드러눕자 후계자인 아들 알프리트에게 회사 전체를 물려줄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한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크루프 법안은 크루프 기업주는 자신의 성 앞에다 크루프를 붙이도록 했다. 이는 1906년 황제 빌헬름 2세가 허용한 것을 히틀러가 다시 인정한 것이다. 황제가 퇴위했으므로 무효화한 칙령을 총통인 히틀러가 다시 확인한 것이다.

 

194335, 연합군의 대공습에 에센 크루프 공장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1천개가 넘는 폭탄, 80개의 지뢰, 29만개의 소이탄이 공장 위로 날아왔다. 2차 대전에 독일이 항복을 선언할 시점에 에센시의 크루프 공장은 3분의1이 파괴되었고, 나머지 3분의1은 심하게 손상되었다. 전후 공장지대의 건물의 약 75%가 철거되거나 황폐화되었다.

 

2차대전 종전후 피괴된 크루프의 에센 공장(1945) /위키피디아
2차대전 종전후 피괴된 크루프의 에센 공장(1945)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