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루프 가문⑦…5대 알프리트, 전범에서 재기
독일 크루프 가문⑦…5대 알프리트, 전범에서 재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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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후 6년간 수감생활, 재산 회복후 재도약…전체주식 재단에 넘겨

 

1945411, 미군 지프차가 독일 에센시 언덕에 위치한 크루프 가문의 저택으로 다가왔다. 미군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크루프 기업의 5대 총수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Alfried Krupp von Bohlen und Halbach, 1907~1967)는 사태를 직감했다. 그는 말끔하게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 입고 모자를 쓰고, 다가올 운명에 담담하게 대처했다.

미군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하인이 문을 열자 철모를 쓴 제복 차림의 미군들이 들이닥쳤다. “당신이 크루프씨입니까.” “예 저가 크루프 폰 운트 할바흐입니다.”

그는 곧바로 지프차에 실려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감옥은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혐의로 1924년 수감되어 저서 나의 투쟁을 쓴 곳이었다.

알프리트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몰렸다. 그와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크루프(Gustav Krupp)가 저지른 범죄는 많았다.

첫째, 크루프사가 독일이 점령한 나라의 공장을 약탈한 혐의다. 전시에 크루프 부자는 오스트리아의 철강공장, 프랑스 알사스의 기계공장과 로스차일드의 트랙터공장, 체코슬로바키아의 기업 등을 빼앗아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둘째, 노동자 착취, 즉 강제징용 혐의다. 크루프는 점령국 포로와 시민들을 불러다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 크루프의 간부는 나치 친위대 SS와 협력해 강제수용소에서 건강한 수감자를 골라 근로를 강요했다. 그 대가로 SS에 자금이 들어갔고, 그 돈은 나치 정권에 이용되었다. 2차 대전기간에 크루프 기업이 부려먹은 노예 노동의 숫자는 1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들 중 특히 슬라브족과 유대인은 인간 이하로 대접받았다. 유대인들은 공장 외곽의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고, 유대 여성들은 위험한 폭탄 뇌관 작업을 해야 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출석한 알프리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출석한 알프리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군수회사 경영자를 전쟁범죄로 다스렸다. 크루프 가문이 대표적인 전범으로 지목되었다. 전후 크루프 가문에는 4대 구스타프와 5대 알프리트가 경영을 맡고 있었다. 소련 국가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은 구스타프를 피고인석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75세 고령인데다 신체마비에 치매로 병상에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다. 꾀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의사들이 건강진단을 한 결과, 구스타프가 재판을 받을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확인되었다.

그 모든 범죄혐의가 아들 알프리트에게 전가되었다. 1945106일에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Nurnberg trials)에서 구스타프에겐 고소장이 발부되지 않고, 알프리트만 출석했다.

1948731일 연합국 재판부는 알프리트에게 12년의 금고형과 전재산 몰수를 선고했다.

전후 에센시가 포함된 루르 지역은 영국 점령지가 되었다. 영국군은 크루프 공장의 설비를 해체해 전쟁배상금 조로 유럽 승전국들에게 나눠줬다. 소련은 동부 점령지에서 크루프 공장의 뜯어갔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50년 독일 대기업의 해체령을 내렸다. 크루프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기업주는 감옥에 갇히고 재산도 뺏기고, 기업은 해체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크루프에 갑자기 행운이 찾아왔다. 전후 국제정세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나치 적폐 청산은 뒤로 하고, 공산세력과의 대결을 정책의 우선 순위로 두게 되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독일과 일본의 산업화를 추진한다. 미국은 반공주를 앞세워 독일에 가한 철강생산 제한조치도 풀고, 히틀러에 부역한 기업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기류변화가 크루프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서독 정부가 먼저 군수기업가들의 사면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1951131일 미국 점령지 최고사령관 존 맥클로이(John J. McCloy)는 크루프 수감자들을 사면하고, 공장도 복원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알프리트는 6년간의 수감생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당시 크루프 공장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했다.

 

크루프 에센 공장(1961년) /위키피디아
크루프 에센 공장(1961년) /위키피디아

 

알프리트는 점령국과 협상에 벌였다. 19533월 알프리트와 미국-영국-프랑스의 점령국 지휘부 사이에 멜렘 합의(Mehlem agreement)가 맺어졌다. 합의에 따르면, 알프리트는 1959년까지 탄광과 철광기업을 매각하는 조건으로 기업 복귀가 허용되었다. 조건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승전국은 크루프 기업을 폐업시키고 자산을 매각하겠다고 약속되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만든 크루프 특혜법안(Lex Krupp)도 인정되어 알프리트가 다시 재산권을 회복해 크루프 기업의 유일한 소유주가 되었다. 그는 석방된후 2년 후인 1953312일 회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출근했다. 총수로 복귀했을 때 직원이 26천명이었다.

알프리트도 크루프 가문울 이어받은 영악한 기업인이었다. 그는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지만,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2억 마르크의 독일국채를 팔아제끼는 상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연합국과의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시간끌기, 버티기로 나왔다. 매각하기로 한 기업들은 1967년 그가 죽을 때까지 여전히 알프리트의 지배 하에 있었다.

 

알프리트는 금융인 출신인 베어톨트 바이츠(Berthold Beitz)를 전문경영인으로 선택해 경영전반에 전권을 위임하고 일상의 업무에서 벗어났다. 알프리트는 40대 중반, 바이츠는 30대말로, 두 사람은 조화롭게 회사를 운영했다.

그런 와중에 독일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 크루프 공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크루프 회사가 또다시 확장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엔 세계화 전략을 취했다. 알프리트로부터 경영권을 위임받은 바이츠는 영국의 옛 식민지에 공장을 신설하고, 나토(NATO)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철의 장막을 걷고 동유럽에도 공장을 지었다. 그리스, 멕시코, 이란, 이집트, 수단에도 진출했다. 인도 동부 오디샤에는 에센시와 비슷한 기업 타운을 건설했다. 항공기 사업에 합작기업을 설립하고, 독일 내에 원자로도 설립했다. 전세계에 크루프가 투자한 회사의 직원은 125천명으로 늘어났고, 1959년 현재 유럽 4, 전세계 12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1년 토고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알프리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1961년 토고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알프리트 크루프 /위키피디아

 

1966년에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크루프의 과잉투자는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이 되었다. 광산회사와 철강회사는 도산 직전에 몰렸다. 독일 국세청은 히틀러 시대에 기업에 특혜로 제공한 판매세 공제 조치를 중단했다. 크루프는 파산위기에 몰렸다.

이때 서독 정부는 크루프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정부가 수출대금 3억 마르크에 대한 보증을 서고, 28개 은행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1억 마르크의 대금을 빌려주고, 지방정부 보증 15천 마르크가 제공되었다. 정부와 은행은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개인기업으로 운영되는 크루프에게 주식회사 또는 합자회사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대주주 알프리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회사를 후대에 물려주지 않고 재단으로 넘기고, 주식회사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알프리트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그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아른트(Arndt von Bohlen und Halbach)라는 외아들을 두었다. 아들은 크루프 성()을 붙이지 않고 할아버지의 성만 가졌다.

독일 상속법에는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재산이 의무적으로 50%가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 알프리트가 가족 재산 전부를 재단에 넘기려 해도 아들이 거부하면 50% 밖에 권한이 없었다. 이혼한 아른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재산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른트는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대신에 연간 200만 마르크의 연금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 금액은 당시 로센라이 탄광에 일하는 광부에게 지급되는 1년치 임금의 두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알프리트는 1966920일 아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주는 조건으로 상속권 포기 각서를 받아 재단으로 넘겼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재단이 알프리트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 재단(Alfried Krupp von Bohlen und Halbach Foundation)이며, 이로써 크르푸 회사는 재단 소유로 전환되었다.

알프리트는 기업 소유구조를 전환한지 1년후인 196773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독일 최대 철강회사를 소유, 경영하던 크루프 가문은 5대로 끝나게 된다. 1811년 프리드리히가 창업한 이래 5대 알프리트가 1966년 주식을 재단에 넘기기까지 크루프가문의 족벌경영은 155년만에 종식되었다.

 

알프리트 사후에 크루프 기업은 전문경영인 바이츠에 의해 1989년까지 경영되었으며, 그후 재단의 결정에 따라 전문경영인이 선임되었다.

1997년 크루프사는 경쟁사인 티센(Thyssen)에 대해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다 티센의 경영진과 노동자의 강한 반발에 부딛쳐 포기했다. 하지만 국제철강산업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티센측에서 합병을 제의하면서 1999년 두회사는 합병을 단행한다. 합병회사 티센크루프(ThyssenKrupp)의 지분은 알프리트 재단 20.9%1대 주주이며 스웨덴 세비안 캐피털 13%, 기타주주 65.4%로 구성되어 있다.

 

티센크루프 에센 본사 /위키피디아
티센크루프 에센 본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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