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동 계곡에서 정선의 그림을 목격하다
수성동 계곡에서 정선의 그림을 목격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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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파트 철거과정서 정선 화폭의 돌다리 드러나…송시열의 각석도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이라 이름 지었지만, 물소리는 듣지 못했다. 여름에 큰물이 들고 비가 그치면 다시 와서 물소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시 종로구 서촌 거리를 걷다가 막다른 지점에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이 곳이 유명해 진 것은 20117월에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에 돌다리가 드러나면서부터다. 그 돌다리는 조선시대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가운데 수성동 그림에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옥인동 일대를 장동(壯洞)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 계곡 /김현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 계곡 /김현민

 

오세훈 시장이 이곳에 생태공원을 만들려고 아파트를 헐다보니 시멘트 투성이 속에 기린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선의 그림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산하를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이어서, 정선이 그린 기린교(麒麟橋)가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곳에 서서 정선의 그림과 실제 모습을 보니 너무나 똑같았다. 정선은 드론에서 내려다 봇듯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실제 모습을 관찰했고, 지상에서 본 모습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원근감을 조절했다. 그림 속의 선비들은 자신과 동료들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기린교였다. 좁은 돌틈 사이에 돌 다리가 놓였다. 자료에 따르면 그 기린교는 너비와 두께 각각 35cm, 길이 3.7m의 장대석(長臺石) 2개를 붙여 만들 것으로 총 너비가 70cm. 다리의 좌우에는 난간이 박혀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수성동 그림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수성동 그림

 

조선시대부터 이 일대가 수성동으로 불렸고 명승지로 소개되었다.

기린교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고 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 수양대군에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신의를 지켰다. 그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해 수성동 계곡에 자신의 호를 따 비해당이라는 별장을 짓고 시와 그림을 즐겼다. 비해(匪懈)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解 以事一人)에서 나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긴다는 의미다.

영조 때인 1751년경 정선의 장동팔경첩 가운데 수성동 그림에 이 다리가 보였으며, 1770년경에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도 '기린교'가 표기되어 있다.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 /김현민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 /김현민

 

이 다리는 195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1960년대에 옥인시범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대통령 경호실이 청와대 부근의 문화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 암반의 벽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되었고, 2011년 옥인아파트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드러났다.

다리를 직접 건널 수는 없다. 절벽이 다소 위험해 펜스를 쳐놓았기 때문에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겸제의 그림에서 기린교를 흐르는 물의 수원(水源)이 두곳으로 나타난다. 숲속을 향해 공원길을 걸으면 물줄기가 조성되는 두 곳이 보인다. 수성동 계곡은 청계천의 청계천 발원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곡을 둘러싼 공원은 아담하다. 천천히 걸어도 10~15분이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공원길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계곡 위를 오르면 인왕산 스카이웨이와 만난다. 인왕산 등산로와도 연결된다.

 

수성동 계곡에 만든 정자 /김현민
수성동 계곡에 만든 정자 /김현민

 

수성동 계곡을 찾아 가는 과정에 길을 잘못 들어 골목길을 한참 헤멨는데, 우연히 어느집 담벼락에 박힌 돌덩어리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맑은 바람이 100세대(3천년)를 이어간다는 뜻이다. 자료를 뒤져보니,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쓴 유서깊은 각석이었다.

이곳은 병자호란때 척화파의 좌장격인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살던 동네다.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에 잡혀가고 형 김상용은 치욕스럽게 살지 않겠다 하여 강화도성 남문에서 자결했다. 송시열이 그 절개를 높이 사 이곳 청풍계에 선생의 절의가 자손만대에 이르라는 의미로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송시열이 쓴 백세청풍 각석 /김현민
송시열이 쓴 백세청풍 각석 /김현민

 

또 길을 헤메면서 발견한 곳이 우당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희영(李會榮, 1867~1832) 선생과 건영, 석영, 철영 등 형제를 기념하는 곳이다. 우당 선생 6형제와 가족은 일제 침략에 맞서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한 후 전 가족으로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해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무장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193111월 만주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상해에서 대련으로 향하던 중에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순국했다.

 

우당기념관 /김현민
우당기념관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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