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후⑧…검은 먹구름 몰려온 한반도
9/11 그후⑧…검은 먹구름 몰려온 한반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08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북한에 유화적인 노무현 정부 출범에 긴장…북한 핵개발에 대북 제제 압박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2002년말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에선 북한을 제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부산했다. 그해 12월 뉴욕에선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회는 북한 경수로에 쓰일 중유 공급을 중단키로 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고, 세계는 또다른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러면 미국이 북한에서 노린 것은 무엇일까.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강력하게 대처한 것은 바로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것이었다. 10년전 소련이 붕괴하고 대적할 세력이 없는 미국으로선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두려운 존재였다. 10년 장기불황에 시달리고 있지만 일본은 세계 2위 경제대국이다. 한국이 혈맹 관계라지만, 미국의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 볼땐 지나치게 북한에 유화적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2년 가을에 북한을 방문하고, 중국도 북한의 개방을 지원하자, 미국은 미국이 극동아시아에서 고립될 것을 두려워 했다. 북한이 경제를 개방하면서 남한과 교류하고, 남북 경제 협력이 강화되면 미국으로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될수 밖에 없었다.

미국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21113일자 컬럼에서 한국의 차기 정부가 미국과 협력해서 북한에 대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하고 단독으로 북한에 부딛치든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칼럼은 미국의 적이 우방의 적이어야 하며, 미국의 도움이 없이 지역문제가 해소될수 없다는 헤게모니 이론을 한반도에 적용한 것이었다.

 

200212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 북한 핵개발 이슈가 터져 나왔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와 북한과의 두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 있다며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며칠후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텍사스 농장에 휴가중인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 핵문제를 무력이 아닌 외교 채널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설득했다.

미국은 2002년 한국 대선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때 미국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두 정부는 이념적으로 조율하기 쉬웠다. 그 덕분에 미국은 외환위기의 늪에 허우적거리던 한국을 지원해 구제했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2002년 남북 정상회담도 미국의 지원 아래 이뤄졌고, 그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군 장성이 군복을 입고 백악관을 방문하는 초유의 사건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과 북한은 국교 회복 직전까지 갔고,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에 평양방문을 추진하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반대로 좌절됐던 것이다.

부시 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졌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말기 2년동안 한-미 관계에 금이 생겼고, 그 틈새는 더욱 커졌다. 부시 정부를 구성하는 보수 핵심층들은 2002년 대선에서 한국에 보수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길 바랬고, 그런 희망을 여러 곳에서 드러냈다.

20021월에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당시는 총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딕 체니 부통령, 폴 월포비츠 국방부 차관등 부시 행정부의 보수 핵심 인사들이 그를 만났다. 그후 워싱턴 포스트지는 부시 정부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이회창 총재의 워싱턴 방문 직후에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2년초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결정된직후 부시 행정부의 한국 담당자 또는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은 노무현이 누구인가를 궁금해 했다. 그는 미국에 생소한 인물이었고, 스스로가 미국을 한번도 오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밝힌바 있다. 한국에 투자하는 펀드 매니저, 신용평가회사 사람들은 모두 노무현의 미국관과 시장경제 및 경제개혁 지속 여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치 중심의 워싱턴과 경제 중심의 뉴욕에서 보는 한국 대선에 대한 시각이 달랐다. 워싱턴의 한국통들은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중 누가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정책에 더 가까운지를 주시했다. 이에 비해 뉴욕 월가 사람들의 초점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이 어느 후보에 의해 보다 강력하게 지속될 것인지 하는 점에 쏠려있었다. 두개의 관심, 즉 대 한반도 정책 조율과 경제 개혁 지속성 여부를 놓고 워싱턴과 뉴욕 월가가 선호하는 한국의 후보가 달랐다는 얘기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2002년 중간선거에서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한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들은 이회창 후보의 노선을 지지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위해 한국의 대북 경제지원을 중단하길 바랬고, 이에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했던 점에서 월스트리트 저널등 보수 언론들은 보다 강력한 대북 정책 조율을 위해 이회창 후보를 선호하는 논평을 썼다.

자본의 논리는 달랐다. 월가 투자자들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 개혁 조치를 지속할 가능성이 큰 노 후보쪽으로 기울었다. 뉴욕타임스지는 이회창 후보가 재벌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고, 경제 개혁에 관해 과거 회귀의 가능성을 우려했다. 살로먼 스미스 바니의 제프리 셰이퍼 부회장은 한 모임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지속할 경우 한국 경제는 발전할 것이며, 개혁을 지연하면 일본처럼 장기침체에 빠질 것이라고 말해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을 지속시키는 정부의 탄생을 바랬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포퓰리즘을 걱정하는 기류도 뉴욕 월가에 잠재해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야당이 공격하는 평등주의자 또는 페론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글로벌 시장에 전해진 것이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의 토머스 번 부사장은 노 후보를 진보적 자유주의자(liberal left)’라고 규정했다.

선거 막바지에 이회창, 노무현 후보가 팽팽하게 경쟁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이 김대중 대통령보다 더 진보적인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차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노 후보의 대미 노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부시 행정부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나라인데다가 테러 이후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 전략면에서 한국의 차기 정권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직후 미국 언론에서는 한국 관련 기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데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미국 언론에 한국 문제가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보수 논객으로 알려진 로버트 노박은 컬럼에서 군부에 처형되기 직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구출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가장 반미적인 대통령임이 입증됐다김 대통령의 추종자인 노 당선자는 한술 더 떠 엉클샘(미국)’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선 직후에 나온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설은 한국 대선 결과에 대해 진정한 승자는 북한이라며 유권자는 때로 실수 할수 있다며 비아냥거렸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미국의 지식인이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선거를 폄하한 것이다. 또한 그 사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쟁 위협을 모른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제대로 아는 미국인들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반미 시위가 한국 자존심의 표시라고 알고 있었지만, 주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지난번(200212) 한국을 방문해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시위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는데, 그들은 미국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은 한 모임에서 한국은 정권이 변해도 정책이 변하지 않는데, 미국이 클린턴에서 부시 정부로 바뀌면서 한반도 정책을 바꾼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관계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50년간의 기득권을 놓치려 하지 않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한국에 원하는 것과 한국의 새 정부가 추구하는 새로운 질서와의 차이가 크다. 이 괴리가 북한 핵 문제와 함께 한반도 위기에 또다른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을 움직이는 지식인의 생각이 한반도 문제에 강경하게 전환되고 있을 때 한국 정부는 제대로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노무현 정부는 당선 직후에서 출범 초기까지 국제 정세 변화를 안이하게 파악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노무현 시대의 불확실성은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 불확실성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한미 관계에 틈이 커지고 있었다. ‘참여의 정부출범에 앞서 정대철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신정부 특사단과 의회 특사단이 잇달아 워싱턴을 방문했지만, 오히려 두 나라의 시각차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특사단 활동이 외교적으로 미숙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차기정부가 본질적으로 한미간의 정책 조율을 하려는 의지가 미흡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포용정책이 부시 정부의 북한 포위전략과 너무나 괴리가 크다는 점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의 해법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출범하기 직전에 정권 인수팀이 재벌 개혁을 내세우며 그 로비단체인 전경련과 대결자세를 보이는 가운데 당선자가 노동단체를 찾아 경제계와 노동계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며 친근감을 보인 사실은 가진자를 불안하게 했다. 노무현 정권이 초기에 가진자와 없는자를 구분하며 분배에 중점을 두는 것은 시장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투자가 계급)을 불안하게 했다. 대선 직후 한달 사이에 한국의 종합주가지수가 700 포인트에서 600 포인트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투자자들이 겁을 먹고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는 게 뉴욕 월가의 시긱이었다.

한국은 1970년대 유신 말기에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삐걱거리다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1997년 뉴욕 월가로 대변되는 국제자본시장이 한국 경제정책을 불신했을 때 IMF 위기를 당한 경험이 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성난 슈퍼파워로 변모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과 분배 위주의 정책 기조는 슈퍼파워를 지휘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와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뉴욕 월가 사이의 괴리를 크게 하고, 이에 따른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