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②…좌절된 대권의 꿈
철강왕 박태준②…좌절된 대권의 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0 0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자당 대선 경선에 나섰다가 노태우 대통령의 권유로 포기

 

1992415일 서울시내 한 안기부 안가에서 이상연 안기부장이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이 부장이 짤막한 말 한마디로 전한 노심’(盧心, 노태우 대통령의 마음)은 이후 박태준으로 하여금 계속 헛발질을 하게 만들었고, 포철 신화의 주인공인 그가 정처 없는 외유길을 떠나게 만든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박 최고위원이 “7인 중진협의회에서 나의 출마를 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이를 수락하겠다고 조건부 출마의사를 표명한지 이틀 후였다. 게다가 반YS진영의 7인 중진협의회가 이틀후의 모임에서 박태준이든 이종찬이든 김영삼 대표와 맞붙을 경선 후보를 최종 결정키로 예정된 절박한 시기였다.

박태준은 굵은 눈썹의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모레 7인 중진협의회에서 나를 단일후보로 결정하면 어쩔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의 의중이라면 한번도 거스리지 않았던 박태준이었건만 이번만은 참을수 없었다. ‘노심이라기보다는 박태준은 민정계 관리자이므로 출마할 경우 대통령의 공정 의지에 어긋난다는 반YS진영의 제한경선론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노 대통령의 뜻을 따른다. 4177인 중진협은 장장 9시간 30분여에 걸친 마라톤 협상 끝에 반YS진영의 단일후보로 이종찬 의원을 선정했다. 박태준은 이날 민정계의 후보 단일화라는 명분 아래 살신성인의 자세로 후보 사퇴의 결단을 내렸다.

일생 동안 성공만이 있었고 타협을 몰랐던 그의 인생역정에 첫 좌절이었다. 이 좌절은 정치인과 경제인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에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고 1년 후 분신이나 다름 없는 포철조차 포기해야만 하는 뼈아픈 종말이 될 줄 몰랐다.

박태준과 20여년간 포철에서 일해온 한 임원의 평가다. “박 회장은 일본에서 공부해서인지 사무라이적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줄을 바꿔서거나 강을 건널 때 말을 갈아나는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노심이 흔들렸어도 그는 노 대통령과의 의리를 지켰습니다. 그의 이런 심성이 곧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철을 경영하면서 궤도를 달리던 기관차처럼 폭발력을 가졌던 그는 정치를 하면서 진흙밭을 달리는 트럭처럼 허우적거렸다.

 

1977년 당시 박태준 사장이 건설중인 포항제철소 제3고로 풍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포스코
1977년 당시 박태준 사장이 건설중인 포항제철소 제3고로 풍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포스코

 

198912월말 포철 광양 4기의 원료구매 및 수출선 확보를 위해 출국 도중에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민정당 대표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순수 경제인이었다. 그는 일정을 앞당겨 199015일 귀국, 즉시 노 대통령을 만나 당 대표를 맡지 못할 사정을 말했다.

“1992년이면 포철이 연산능력 2,000만톤의 최종 목표를 달성합니다. 그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해외관계에서 제 얼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 대표보다는 포철 회장으로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때 노 대통령은 그러면 포철도 맡으시오라면서 권유해 박태준은 정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박태준의 망설임을 당시 조용경 정치담당 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박준교 민정당 대표가 3당 통합의 천기를 누설해 당 대표의 경질이 논의될 때였지요. 박 회장은 노 대통령과의 정의를 생각해서 당 대표를 맡았지만 오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기업은 직선적·비타협적인 그의 성미로 마음대로 했지만 정치는 타협을 해야 하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만큼 성미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처음에 정치를 모른다는 이유로 미묘한 현안에 언급을 자제했다. ‘정치 9과 싸워 이길수 없다는 인식보다는 노 대통령을 대신한 민정계 관리자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도 내각제 합의개헌 파문, 대선거구제 논란을 겪으면서 민정계 후견인의 자세에서 반YS 선봉장으로 입지를 전환한다.

해불양수(海不讓水), 화이능실(花而能實)이라.(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는 일이 없고, 꽃은 모름지기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가 즐겨 쓰던 붓글씨의 의미처럼 단순한 민정계 관라자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꿈을 바꾼 것은 노 대통령 임기 1년반을 남겨둔 199110월께였다.

19911015일 포철 내에는 극비의 팀이 조직된다. 후에 언론에서 명명한 대선기획단 바로 그것이다. H-K차장등 차장급 2명과 계장급 3명에 탐장은 K모 상무.

이 무렵(11월 중순) 청와대에선 노 대통령, 서동권 안기부장, 정해창 비서실장, 손주환 정무수석 등이 모여 후계구도에 대한 첫 논의를 했다. 이때 김대중 민주당 대표를 이길수 있는 적격자는 김영삼 대표라는 논의가 조심스럽게 거론되었다. 이같은 논의에도 불구, 노 대통령은 1992110일 연두회견에서 총선후 전당대회에서 완전경선을 통한 차기 대통령 후보 선철을 강조하며 노심의 실체에 대해 정파마다 아전인수격으로 각각 해석했다.

 

새해들어 각 정당·정파별로 차기 대권주자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박태준은 전당대회에 경선후보로 나설 결심을 굳힌다. 이때 그의 출마를 적극 권유한 사람은 정석모, 최재욱 의원 등이었고 조용경 정치담당 비서도 어차피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대권도전에 나설 것을 적극 간청했다. 박태준은 YS와 후보 경선에 맞설 결심을 굳히고 짊어질 십자가라면 피하지 않겠다며 이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포철내 대선기획단(당시엔 명칭이 없었다)이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면 이 조직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른바 대선기획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한 간부의 진술이다. “이름만 거창하게 명명되었지 실제 한일은 TJ의 이미지 메이킹과 여론동향 파악이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사회 저명인사를 만나 여론 동향을 들어보고 박 회장의 출마에 대비해 포철 홍보를 강화하는 것이었지요.”

이 간부의 진술은 포철의 1992년 홍보비가 18천만원으로 19913월 대비 670% 늘어났고 기밀비는 19922월에 전년대비 140%, 2210%, 4170%, 5203% 각각 늘어난 사실(1992년 국감자료)에서도 입증된다.

포철내 대선 조직은 또 박 회장이 출마할 경우 가장 큰 약점, 어머니가 일본인이다는 악성루머를 불식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를 위해 1991년 추석 때 박 회장이 경남 양산에 살고 있는 모친 김소순 여사를 방문해 대화하는 장면을 한시간짜리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놓기도 했다.

박태준은 노 대통령이 민정계 관리를 보다 강화하라”, “후보 선출 방법은 자유경선으로 한다고 한 말만 믿고 경선을 겨냥해 제14대 총선(11992324)에 엄청난 돈을 썼다. 이 때 그가 정치자금을 많이 쓴 사실은 여러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그가 100~500억원의 정치자금을 뿌렸다는 설도 있지만 쓴 금액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확인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국세청 세무조사의 빌미를 주고 19933월 포철 주총에서 박태준 사단의 몰락으로까지 연결된 정치자금은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어디에, 어떻게 쓰였을까. 조용경 정치담당 비서의 말이다. “1년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엔 경제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지요. 기업들은 박 회장 주변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박 회장은 이들 기업인이 건네주는 정치자금을 받아 총선비용으로 쓴 것으로 압니다. 포철의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지요.”

박태준이 총선 전후에 집중적으로 뿌린 정치자금은 포철의 비자금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어떻게 조성됐을까. 국민당 정치자금을 조성해준 협의로 현대중공업에 세무조사를 들어가 1주일만에 개가를 올린 국세청도 포철 세무조사에서는두 달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다.

정가와 포철의 측근들은 공통적으로 박태준이 자의로 정치자금을 조성해 쓰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노 대통령의 묵시적 동의 또는 지침을 얻어 민자당을 위해 썼다는 것이다.

정차자금 조성은 박태준을 포철을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시류에 편승해 탄력적으로 운신하지 못하는 그의 기질, 말기에는 가족의 소견에 지나치게 기울인 일, 지나치게 심복을 믿어 결국은 포철까지 떠나게 된 것은 모두가 패장이 짊어져야 할 업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