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③…정치적 위기
철강왕 박태준③…정치적 위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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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정주영 대표는 끌어당기고, YS의 민자당에서는 견제하고

 

1992107일 이른 아침 서울 성북구 성북동 소재 현대그룹 영빈관.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이틀전 민자당 탈당과 최고위원직 사퇴를 선언한 박태준씨를 불렀다. “국민당에 입당해 나를 도와 주세요,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 자리를 주겠습니다.” 정주영 대표는 박태준의 국민당 입장을 적극 권유했다.

박태준은 완곡히 거절했다. “저는 집권당의 최고위원을 지낸 만큼 의리를 저버리고 혼자 입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박태준은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다. “양김 시대 청산과 정치 개혁을 위해 민자당 및 민주당 탈당파, 국민당, 무소속 의원을 합쳐 신당을 만듭시다. 이 신당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민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내고 집권하면 내각제로 전환해 지역패권주의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국민대표로는 강영훈 전 총리를 모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주영과 박태준의 이날 비밀회동은 동상이몽으로 끝났다.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박태준은 이미 정치에 신물을 느낄 때였고, 새로 시작하는 정주영 대표는 뭔가 해야겠다고 의욕이 넘치는 때였다.

정 대표의 출마의지를 굽힐수 없음을 깨달은 박태준은 마지막 조언을 했다. “정 대표의 고령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대통령 당선후 2년만 하다가 내각제로 전환해 내각 수반에게 실권을 넘기겠다는 공약을 내세우십시오.”

이날 회동은 각 정파에 각각 다른 오해와 빌미를 제공했다. 민자당의 시각은 박태준씨가 민자당, 국민당, 신당에 모두 다리를 걸치며 선거 막바지까지 판세를 쟀다는 것이었다. 국민당 정주영 대표는 선거 직전 여의도 집회에서까지 줄기차게 박태준씨가 입당 약속을 했고 집권 후 총리를 맡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박태준의 정치담당 비서였던 조용경씨의 설명이다. “박 회장이 정 대표에게 국민당 입당을 약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민자당 탈당 전후로 정 대표를 세 번 만났지만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지요. 비록 정치에 환멸을 느껴 탈당은 했지만 자신이 몸 담았던 당을 상대로 싸울 수 없다는 그의 기질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측근들의 이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그의 행적에는 몇가지 미스터리를 남겼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 선언(918) 후 정계 은퇴를 결심하면서도 박철언, 채문식씨 등과 만나 신당 창당을 논의한 일(104), 김영삼 대표와의 광양담판(1010)에서 백의종군을 다짐해 놓고도 정주영 대표와 또다시 만난 일(1020일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해외체류중(11~12) 국민당 입당설이 난무했을 때 사실이 아님을 공식 부인하지 않은 사실도 양다리 걸치기의 의혹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19929월 이후 대통령 선거일까지 박태준이 보인 행동의 진의는 무엇일까.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경선 후보 출마를 저지당한 박태준은 918일 공명선거 실시를 위해 대통령 스스로 당적을 포기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태준은 노 대통령에게 또다시 무시당한 느낌이었고, 마침내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이 환멸은 박태준으로 하여금 민자당 탈당과 포철 회장직 사퇴를 결심하게 하는 심적 동기가 되었다.

당시 박태준이 노 대통령의 탈당 선언에 대해 정치 측근에게 말한 내용이다. “민주정치란 결국 정당정치인데 정당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정당을 떠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영국과 미국에서도 대처 수상,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들이 몸 담았던 당의 승리를 위해 재임 중에도 뛰지 않았는가. 그러면 앞으로 모든 대통령이 임기 끝 무렵에 당적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박태준에겐 노 대통령의 탈당 자체도 못 마땅했지만 대리 수장이긴 하나 명색이 민정계 장자인 자신을 따돌린 채 이춘구, 이한동 의원과 큰 일을 논의한 노 대통령이 못내 서운했다.

이로써 박태준은 정가에 입문한 후 노 대통령에게 세 번 따돌림을 받았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그 첫 번째는 3당 합당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TJ에게 노 대통령이 귀뜸조차 하지 않았던 사실이요, 두 번째는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시 노심특유의 음성다중방송으로 출마를 부추겨 놓고 안기부장을 통해 저지시킨 일이며, 노 대통령의 탈당이 그 세 번째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포철 종합준공식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광양제철소로 내려가 이른바 대사색에 들어갔다. YS캠프에 가담해 선거운동을 지원할 것인가, 신당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비생산적인 암투로 밤을 지새우는 정치판에서 결별할 것인가. 그의 행적과 측근들의 증언을 돌이켜 보면 이미 내린 결론은 마지막 대안, 즉 정계은퇴였다.

박태준은 102일 광양4기 준공기념식에 참석키 위해 내려온 노 대통령에게 민자당 탈당과 포철 회장직 사퇴의 결심을 밝히자 노 대통령은 당신 뜻대로 하시오라며 더 이상 그의 갈 길을 막지 않았다.

그러면 박태준씨가 정계은퇴 발표와 동시에 포철 회장직을 포기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한 측근은 이렇게 증언했다. “백 회장은 정치에 손을 떼기 위해서는 포철의 모든 공직을 맡은 채 정치만 안하겠다고 하면 뭔가 욕심을 내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포철 회장직을 겸직한 것은 해외에서 그의 얼굴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포철이 확장공사를 마무리한 마당에 그 필요성마저 없어진 것입니다.”

 

준공식을 마친 박태준은 상경해 104일 각각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김영삼 대표와 반YS성향의 탈당파 그룹과 비밀회동을 가졌다.

이날 YS와의 회동에서 박태준은 나는 지금까지 YS의 후보화에 반대해 왔는데 아무런 명분 없이 선대 위원장을 맡을수 없다내각제 개헌, 선거공영제, 중대선거구제 등 평소 주장해온 일련의 프로그램을 받아주면 이를 명분으로 선대 위원장을 맡겠다고 제의했다. YS측은 이 제의가 의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워 탈당 수순을 밟으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1010일 김영삼 대표와의 광양 담판에서도 박태준은 탈당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104일 박태준은 YS와의 회담과는 별도로 박철언, 김용환, 채문식, 이자헌, 유수호, 장경우씨등 탈당파 인사들과 만났다. 이들은 양김시대 청산, 내각제, 선거공영제, 중선거구제의 원칙 아래 새로운 정치집단을 결성할 것을 합의하고 박태준씨가 앞장설 것을 권유했다.

후에 국민당에 합류한 채문식 전 의원의 회고다. “박태준씨를 비롯해 반YS진영 7인은 정치개혁을 하자는데 의견을 함께 했다. 나머지 6명은 박태준씨가 앞장서 책임을 지라고 권했다. 박태준씨는 전자에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후자에는 확답을 않았다.”

박태준은 이날 모임에서 합의된 내용을 가지고 3일후 성북동 현대그룹 영빈관에서 정주영 국민당 대표를 만났고 강영훈씨를 국민후보로 하는 거대 신당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정 대표의 막무가내를 막지 못했다.

 

1978년 9월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에서 합동차례를 지내는 박태준 사장 /포스코
1978년 9월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에서 합동차례를 지내는 박태준 사장 /포스코

 

1전로의 차지(조업회수)5% 상승하고 있음. 2전로는 현상유지, 3전로의 차지는 하강추세임. 현재 조업상태로는 제1전로의 출선율이 가장 높음.“

정주영 대표와 합의 도출을 실패한 후 신당 불참 및 정계은퇴를 선언한 박태준은 115일 출국해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던 중 포철 비서실에서 보내온 팩시밀리를 구자영 상무로부터 건네 받았다. 언뜻 보기에는 포철 현장의 조업도에 관한 보고였지만 실제로는 대선 후보의 판세 변화에 관한 정보 분석이었다. 1전로는 김영삼, 2전로는 김대중, 3전로는 정주영 후보를 각각 지칭했고 출선율은 득표율을 의미하는 암호였다.

국회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선공장의 조업도로 보아 그쪽이 될 것 같습니다.” 국회쪽 비서는 포철공정 과정에 따라 재선(YS), 제강(DJ), 압연(CY) 공정이란 암호용어를 썼다.

박태준은 민자당, 국민당, 신당(새한당)의 입당 및 지원요청을 뿌리친 채 해외에 장기체류하면서 이른바 포철의 남방정책추진에 몰두했다. 일본 중국 베트남 미얀마 홍콩을 넘나들면서 합작공장 건설, 북경~홍콩간 고속도로 개설 등 굵직한 프로젝트에 합의했다.

11월 중순 국내에선 국민당이 박태준의 입당설, 외압에 의한 귀국 저지설을 주장했으나 박태준은 끝내 선거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1117일 정주영 대표는 이병규 특보를 동경에 파견해 입당을 권유했으나 박태준은 수행비서를 통해 국민당에 입당하지 않는다며 돌려 보냈다.

선거 전날인 1217일 상오 박태준에겐 돌이킬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민자당이 TJ 입당을 기정 사실화하는 국민당의 막판 세몰이를 숨죽이기 위해 박태준이 김영삼 후보에게 보낸 사신을 공개한 것이다. 이 사선은 정석모 의원이 박심(朴心)을 확인하기 위해 1126일 오사카에 머물고 있던 박태준을 만나 비공개의 조건으로 받아온 편지였다. 그것도 민자당에 불리한 대목이 삭제된 채였다.

박태준은 이날 하오 베트남을 출발해 홍콩으로 도착한 후 이 사실을 알고 서울의 정치 담당 비서를 불렀다. “그 사신이 특정인을 지지하는 것처럼 대서특필되는 상황에서 나로서도 최소한의 인격을 방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다. 의원직 사퇴서를 즉시 국회에 제출하고 사신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라.”

김영삼이 이끄는 민자당측이 박태준의 이날 처사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박태준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YS측에선 박태준이 국민당 입당을 타진한 것을 사실로 보았다.

한 전직 임원의 평가다. “박 회장은 탈당후 민정계 의원 30여명을 이끌고 국민당에 입당해 정 대표와 우위의 동등한 지분을 얻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월계수회의 연결고리였던 강재섭 의원이 탈당을 보류하면서 대다수 민정계 의원이 잔류하게 됐습니다. 박 회장은 세불리를 감수하면서 국민등에 들어갈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든 백태준은 대선 후 민자당 수뇌부의 눈에 비껴나게 되었고, 포철 회장직 사퇴후 추대된 명예회장직마저 포기하는 최후를 맛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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