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④…구명 운동
철강왕 박태준④…구명 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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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득표 사장, 조말수 부사장이 총대…최형우 거론에 YS “다시 거론말라”고 잘라

 

 

19933월초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지 며칠후, 박태준 포항제철 명예회장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 측근들을 불러 놓고 침통하게 말했다. “나로 인해 포철이 망하고, 여러 임원들이 피해를 볼 필요가 없다.” 그는 이어 포철 명예회장직은 물론 제철학원 이사장직 사의도 밝혔다.

측근들은 당황했다. 김호길 박사(포항공대 학장)가 나섰다. “회장님, 사표를 내서는 안 됩니다. 포철과 저희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주총(312)까지는 시일이 남아 있으니 마지막 까지 뛰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서슬 퍼런 국세청 세무조사반이 들어와 비자금 유출 여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YS캠프에 여러 채널을 통해 호소한 박태준 구명운동이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을 박태준 자신조차도 감지할 때였다.

당시 북아현동에 모인 측근들의 분위기를 한 전직 전직 임원은 말했다. “어때까지만 해도 새 정부가 설마 박태준 사단을 칠 것인가 하는 낙관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지요. YS측근들에게 다리를 걸쳐 놓고 막판에 박 회장이 김 대통령을 만나 그 동안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사죄하면 뭔가 사면이 내려질 줄 알았습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도 이 방법이 통했으니까 마찬가지일 줄 알았어요.” 이 낙관론은 결국 박태준 사단에겐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12월말 김영삼 대통령 당선이 결정된 후 포철의 박태준 사단에 비상이 걸렸다. 박태준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포철의 자랑스런 내부승진 원칙을 지켜라. 누군가 포철을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측근들에게 지시하고 1225일 또다시 훌쩍 장기 외유에 나선 뒤였다.

황경로 회장, 정명식 부회장, 박득표 사장 등은 포철 서울사무소에서 연일 구수회의를 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대선 기간중 박태준씨가 YS 당선에 협조하지 않았고 투표 전날 민자당의 사신 공개에 항의, 의원직마저 포기했으니 뭔가 새 정권으로부터 조치가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내린 결론은 1980년대초 신군부 등장 때의 방식이었다. 즉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해 타협점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박득표 사장이 최형우·박관용 의원을, 조관행 제철학원 전무는 경복고 동기동창인 김덕룡 의원을 각각 맡았다. 이른바 개혁의 트로이카를 모두 접촉 대상으로 삼았다. 박태준씨가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일본 등 해외의 정재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포철의 명예회장 자리만으로도 국가에 보탬이 된다는 게 구명의 논리였다.

한 전직임원은 이렇게 증언했다. “박 사장이 총대를 메고 박태준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최형우 의원을 여러차례 만나 호소했고, 박관용 의원도 만났지요. 두 의원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특히 최 의원 쪽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최 의원은 두 번이나 박태준의 구명을 진언했으나 고위층으로부터 그런 얘기라면 다시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박태준 구명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박태준의 정계와 포철 내 측근들은 지연·학연을 총동원, 권력 핵심에 줄을 댔으나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건만 박태준은 포항과 광양의 아성을 25년이나 지키면서 외부인사의 영입 없이 내부승진만으로도 포철을 경영했다.

 

1992년 광양 4고로 화입식 모습. 이로써 포스코는 조강 연산 2100만 톤 체제를 구축했으며, 연산 1140만 톤의 광양제철소는 세계 1위 제철소가 됐다. /포스코
1992년 광양 4고로 화입식 모습. 이로써 포스코는 조강 연산 2100만 톤 체제를 구축했으며, 연산 1140만 톤의 광양제철소는 세계 1위 제철소가 됐다. /포스코

 

기실, 박태준의 포항 회장 자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했을 때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은 박태준에 대해 과거 사감을 들어 포철 사장직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했다. 당시에도 포철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이사였던 조말수씨가 당시 실세였던 허삼수·이학봉씨에게 줄을 댔다. 조씨와 이들은 절친한 사이였으며 특히 허삼수씨와는 말을 터놓고 지낼 정도의 죽마고우였다. 이들은 전두환 위원장의 시각을 교정했으며 허화평·정호용씨도 TJ를 위해 뛰었다. 이 덕분에 박태준은 포철을 계속 지키게 됐고, 그후 11대 국회에 진출, 초선에도 불구하고 재무위원장을 맡는 등 스스로 정치적 보호막을 만들었다.

두 번째 위기는 6공화국 초에 닥쳐 왔다. 노태우 정부 실세들은 박태준의 20년에 걸인 장기집권을 경질의 첫 번째 이유로 내세웠다.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은 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조카 이창석씨에게 협력회사를 떼준 일들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재계에는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이 포철 회장직을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다른 한편에선 노태우 대통령은 친인척을 배제한다는 원칙에 따라 금진호 기용론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설도 그렇듯하게 퍼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박태준은 포철을 수성하게 됐다.

포철 사장을 지낸 박득표씨와 조말수씨. 이들은 박태준 구명운동의 책임을 진 포철맨들이었다. 한 사람은 스스로 물러나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개혁의 논리를 펴면서 박태준 시대의 단절에 앞장 섰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10년의 세월이 인간사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것이다.

박태준을 위한 막후 로비활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1993210일께. 포철 서울사무소에는 이상한 첩보가 날아 들었다. 정부의 고위층 정권인수팀의 실세들이 모여 포철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의견을 모았다는 정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철 핵심부는 정부가 쉽게 회사에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후인 212일 저녁 무렵 국세청은 “13일부터 포철에 세무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니 준비를 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포철에 보냈다.

국세청과 포철은 세무조사에 대해 “1985년 조사 이후 8년이 지나 세무조사를 받을 시기가 됐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국세청으로서는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고, 포철로서는 진행중인 구명운동에 흠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국세청이 요구한 자료는 정상적 세무조사보다 훨씬 강도가 강했다. 과장 이상 간부와 임원 전원(903)의 주민등록번호 및 1989년 이후 신상변동 내역, 1989~913년간 은행당좌계정 원장과 수표결제 내용, 어음지급발행대장, 일시에 거액이 오가는 철강수송 담당선사의 거래일지, 포철이 원료·설비를 구매한 거래처와 제품을 판매한 거래처의 목록 및 전화번호까지 포함되었다. 자회사, 거래회사, 금융기관 등에도 조사의 손길이 미쳤다.

국세청의 강경한 분위기를 통해 권부의 의중을 감지한 포철에는 새 정부 출범 전후인 2월말께부터 일종의 세포분열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박태준씨와 함께 회사를 떠내야 할 간부와 포철을 지킬 임원의 경계선이 서서히 나타났다.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거대한 단일세포를 이루었던 포철인들. 군대식 매지니먼트 아래 황색 제복의 옐로아미로 불렸던 지휘체계는 무너져 갔다. 구명운동을 위해 댄 줄은 이제 새 포철 건설을 위한 루트로 전환되었다. 정보의 역류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루트를 통해 새 정부가 포스트 TJ시대를 이끌어갈 후임 회장으로 이명박 의원(현대건설 회장), 안병화 당시 한전 사장을 물망에 올리고 있다는 정보가 포철 핵심에 전해졌다.

이 의원은 포항 출신으로 박태준씨만큼 전문경영인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고, 안 사장은 포철 사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포철인들의 반발을 줄인다는 게 정부측 판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선택은 정명식 회장, 조말수 사장의 체제였고 조 사장이 청와대에 건의한 포철 개혁론은 박태준 이후를 걱정하던 고위층을 안심시켰다. 서서히 진행되던 세포 분열은 312일의 주총을 통해 새로운 핵을 형성하게 되었고, 구각이 떨어져 나가는 탈바꿈이 이뤄졌다.

주총 이틀전 박태준은 포철 대표이사 앞으로 포철 및 제철학원 이사장에 대한 사표를 내고 출국했고, 이때 부인 장옥자 여사가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출국을 서둘렀다. 장 여사는 일본까지의 길안내를 위해 포철 비서부의 장모 부장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장 부장이 출국 수석을 체크하던 중 출국정지 대상자로 지정돼 있음을 확인했다.

현직 간부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박 회장이 출국하자 국세청은 자금줄이 대거 해외로 도피할 것을 우려해 출국정지 요청을 법무부에 냈던 것 같습니다. 주총에서 물러난 임원 6명과 현직의 김용운 전무뿐 아니라 비서 자금 경리부의 부장 차장 과장급 10명까지 출국 정지를 요청한 것은 국세청의 이같은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구명운동이 박태준 사단의 자위노력이라 한다면 국세청 세무조사는 이에 대한 반대논리의 정부측 대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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