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왕비’ 단경왕후의 양주 온릉 개방한다
'7일의 왕비’ 단경왕후의 양주 온릉 개방한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1.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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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시설보호구역 내 왕릉…‘역적 신수근의 딸’ 이유로 중종반정후 폐위

 

2017KBS 2TV에 사극 7일의 왕비가 방영되었다. 내용은 반정으로 남편 진성대군(晉成大君)이 임금(중종)에 오르지만, 부인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는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 당한다는 스토리다.

 

이 단경왕후의 무덤이 공개된다. 무덤은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있어 않고 비공개로 관리해온 양주 온릉(楊州 溫陵, 사적 제210)14일부터 처음으로 일반에 무료로 시범 개방하기로 했다.

양주 온릉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제10대 임금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가 되었으나 신수근이 중종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57(명종 12) 세상을 떠나자 친정 거창신씨 선산에 모셔졌는데, 사후 182년 만인 1739(영조 15)에 왕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고 정하고, 형식도 능에 걸맞게 정자각과 석물 등을 배치한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이번 온릉 개방은 양주시민과 양주시의 적극적인 요청과 협조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양주시는 관할 부대와 협의를 거쳐 온릉 주변에 화장실가 주차장등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문화재 안내 해설사를 배치해 안내 해설도 제공한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소재 온릉 /문화재청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소재 온릉 /문화재청

 

단경왕후는 조선 왕조사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비로 기록된다.

1506, 99(음력) 역적의 딸이라는 누명을 쓴채 19세의 왕비는 궁궐에서 쫓겨난다. 12살에 결혼했으니, 남편과 헤어진 것은 결혼 7년째다. 남편이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그는 아버지 때문에 한 많은 생을 산 것이다.

연산군 12,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대신들은 악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폐위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진성대군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거사 당일인 91, 무사들이 진성대군 집을 에워쌌다. 진성대군은 형인 연산군이 휘두르는 칼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사들이 집을 포위하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진성대군은 이제야 죽는구나며 벌벌 떨고 있는데, 부인 신씨가 바깥 상황을 파악해보았다. 집을 에워싼 말들이 집의 바깥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부인은 만약에 말머리가 집쪽으로 향해 있으면 위험할 수 있지만, 말머리가 밖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를 보호해주려는 것이라며 남편을 진정시켰다. 나이 19세의 젊은 부인은 현명했고,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여인이었다. 중종은 유약하고 우유부단했다. 게다가 정변을 주도한 신하들이 설치는 상황에서 남편이자 임금인 중종은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중종의 첫부인 신씨의 아버지는 신수근이다. 신수근은 누이가 연산군의 부인이 되었고, 딸을 진성대군에게 시집 보낸 권력가였다. 게다가 신수근의 어머니는 임영대군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온통 왕실과 겹겹이 혼인 관계를 맺은 덕택에 연산군 때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냈다.

반정 직전에 두목격인 박원종 등이 좌의정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에 그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물어보았다. 신수근이 그 말의 의미를 금새 알아차렸다. 신수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임금(연산군)이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화를 냈다.

반정 세력들은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적폐 세력이 되었다. 만일 그때 신수근이 딸의 편에 서겠다면서 쿠데타 세력을 지지했더라면 그의 딸은 왕비로 남아 있었고, KBS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사가 일어나자 신수근은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렸다. 쿠데타 세력들이 신수근을 굳이 죽여야 했을까. 신수근은 자신에게 가담 여부를 묻는 반정세력들을 고변(고발)하지 않았다. 그 것만으로도 살려줄수 있었을텐데, 권력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연산군 때 정승을 한 죄,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죄로 타도할 대상, 즉 적폐세력이 된 것이다. 반정 세력들은 거사를 일으킨 후 가장 먼저 신수근을 죽였다. 연산군의 부인인 신수근의 누이가 폐비가 되는 것은 당연한일, 그런데 딸이 문제였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다. 18살의 중종이 언젠가 장성해 권력을 쥐면, 왕비 신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 걱정되었다. 싹을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한다는 절박감에 박원종의 무리들은 임금에게 왕비의 폐위를 요구했다. 죄목은 역적의 딸이라는 것.

 

중종은 유약했다. 임금을 갈아치운 세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자신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이때 신씨는 남편을 위해 어느 자리에 있어도 무방하다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했다. 92일 반정이 일어나고, 9일에 신씨가 궁궐에서 쫓겨났다.

신씨가 궁에서 쫓겨나던 150699(음력), 중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원종 등 신하들이 "거사 후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궐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宮壼, 왕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라고 아뢰었다.

새 임금은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고 대답했다.

신하들는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大計)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라고 압박하자, 중종은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고 전교를 내렸다.

임금은 아내를 내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속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가게 하리라."고 명했다. 초저녁에 신씨(愼氏)가 교자를 타고 건춘문(建春門)을 나와, 하성위의 집으로 들어갔다.

 

2017년 KBS 2TV에 방영한 사극 「7일의 왕비」 포스터 /KBS 웹사이트
2017년 KBS 2TV에 방영한 사극 「7일의 왕비」 포스터 /KBS 웹사이트

 

임금이자 남편이 한다는 말이 고작, “조강지처인데라는 말 뿐이었다. 단경왕후는 반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폐비는 이혼을 의미한다. 조선의 유교사회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인이 역적이 되거나 인륜에 반하는 일을 저질렀을 경우에 이혼이 허락되었다. 양반은 예조에서 이혼을 허가했고, 평민의 경우엔 이혼이 비교적 자유로왔다. 왕비의 경우 폐위라는 제도를 통해 이혼시켰다.

 

단경왕후는 이혼당했다. 단경왕후는 사가로 물러난뒤 중종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남편인 중종의 임종 직전에는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소문일 뿐이었다.

 

사직공원에서 인왕산을 오르다보면 너럭바위가 있다. 이 곳에 단경왕후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 폐비가 되어 하루 이침에 궁궐에서 쫓겨난 왕비는 남편을 쉽게 잊지 못했다. 그녀는 인왕산 자락에 올랐다. 그리고 붉은 치마를 바위에 펼쳤다.

부디 이 붉은 치마를 날 본 듯 여겨 주시어요.”

이후 백성들은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반정세력이 주축이 된 훈구파가 힘을 잃고 조광조등 개혁파들이 들어섰다. 조광조는 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사랑이 식은 것이다. 그것보다 매정한 것은 새로 얻은 왕후가 왕자를 생산했기 때문에 단경왕후가 복위해 왕자를 낳으면 후계구도가 복잡해진다는 이유를 댔다.

중종은 단경왕후를 쫓아낸후 많은 후궁을 두었다. 그 중에서 장경왕후를 중전에 책봉했다. 장경왕후는 결혼 9년만에 아들 인종을 출산하고 출산 직후 25살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산후병을 돌본 사람이 MBC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이다. 장경왕후가 죽었을 때 장금은 의녀였기 때문에 벌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중종이 막아 주었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후궁 중 하나였던 경빈 박씨가 중종의 총애를 기반으로 왕비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경빈 박씨가 자신이 낳은 복성군을 내세우려는 야심을 알기 때문에 후궁 가운데 선택하지 말고 간택의 방법으로 왕비를 책봉하자고 했다. 간택으로 뽑은 왕비가 문정왕후였다.

 

배다른 아들 인종이 즉위해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했다. 단경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죽을때까지 홀로 살았다.

1557(명종 12) 71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왕후(王后) 시부모의 예()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죽은후에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15(1739) 왕후로 복위되었다. 그때 단경(端敬)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능의 위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고, 온릉(溫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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