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안중근의사 가묘에 새 비석이…
효창공원 안중근의사 가묘에 새 비석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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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회복하면 고국에 묻으라” 했건만, 순국 백여년이 지나도록 유해도 못 찾아

 

1년반만에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묘를 찾았을 때 달라진 것은 안중근 의사 가묘에 비석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지난해 4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엔 세 의사의 무덤에 비석이 서 있었고 안중근 의사 가묘에만 비석이 없어 서운했다. 그 사이에 안중근 의사 무덤에 비석에 세워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 비석은 옆의 세 비석과 같은 크기에 같은 모양이지만, 비석의 글자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본관 순흥. 1979년 황해도 해주 출생.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였고, 을사 늑약 이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쓰셨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을 맹세하셨다. 10901026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여 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시다가 1910326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중국 뤼순감옥 인근에 매장되셨으나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여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고자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삼의사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2019년 11월) /김현민
삼의사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2019년 11월) /김현민
2018년 4월에 본 삼의사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김현민
2018년 4월에 본 삼의사묘 내 안중근 의사 가묘 /김현민

 

이 곳이 안중근 의사의 가묘다. 가묘(假墓)란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임시 묘라는 의미다.

서글프게도 후손들은 순국한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묘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해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순국 당시 뤼순 감옥 형무소장인 일본인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안 의사 사형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서 집안에 안 의사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숭모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그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는 아버지의 증언과 남긴 사진을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와 측량을 통해 사진에 나타난 지형을 찾아 200834월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의 뼈는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땅이 파헤쳐져 당초 목표로 삼았던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중국측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북한측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는 안 의사의 유해가 돌아오길 쓸쓸히 고대하고 있다.

 

삼의사 묘 (2019년 11월) /김현민
삼의사 묘 (2019년 11월) /김현민
2018년 4월에 본 삼의사 묘 /김현민
2018년 4월에 본 삼의사 묘 /김현민

 

안중근 의사 옆에 묻힌 삼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다.

윤봉길 의사(尹奉吉, 1908.6.21. ~ 1932. 12. 19.)1932429, 중국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국왕 생일 축하겸 전승기념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단장을 죽였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에 대해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백정기 의사(白貞基, 1896. 1. 19.1934. 6. 5.)는 무정부주의자로 친일 압잡이를 처단하고 일본 원흉들을 처단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0. 8. 101932. 10. 10)193218일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독립투사였다.

 

이봉창 의사상 /김현민
이봉창 의사상 /김현민
이봉창 의사 선서문 (등록문화재 745-1호) /문화재청
이봉창 의사 선서문 (등록문화재 745-1호) /문화재청

 

이봉창 의사상은 삼의사 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거사에 앞서 김구 선생이 이봉창 의사를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 집으로 데려가서 선서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봉창 의사는 선언서를 작성했다.

나는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서하나이다.”

 

의열사 /김현민
의열사 /김현민
의열사내 백범 김구 선생 사진 /김현민
의열사내 백범 김구 선생 사진 /김현민
의열사내 안중근 의사 사진 /김현민
의열사내 안중근 의사 사진 /김현민
의열사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김현민
의열사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김현민

 

의열사(義烈祠)도 인근에 있다.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곳에는 김구,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7인의 영정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동녕은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과 초대 주석을 역임했고, 조성환은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군무부장을, 차리석은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역임했다.

 

백범김구 기념관 /김현민
백범김구 기념관 /김현민
백범 김구 묘 /김현민
백범 김구 묘 /김현민

 

그 위헤 백범김구 기념 박물관과 묘소가 있다. 묘소에는 나이드신 두 분이 절을 했다. 나도 경건하게 묵념을 했다.

언덕을 오르면 북한반공투사 위령탑이 있다.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김현민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김현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이자 원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문효세자는 5세에 사망하고 그곳에 묻혔는데, 고종 7(1870) 12월에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왕실의 묘역이었던만큼 효창원은 지금처럼 공원이 아니라,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던 곳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宣惠廳)의 창고(만리창)에 야영하며 숲이 파헤쳤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주둔하며 독립군 소탕을 위한 비밀작전기지로도 사용했고,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이 곳을 일반인이 드나드는 효창공원으로 지정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고, 김구는 일본 밀정의 지휘소였던 이곳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열사들의 묘소로 사용키로 했다. 194679일에 김구에 의해 동산 위에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등의 3인의 독립운동가 묘소가 만들어 졌다. 194975일에는 국민장을 치른 김구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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