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⑤…장기 외유
철강왕 박태준⑤…장기 외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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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멍들었지만, 해외여행에서는 인정받는 기업인

 

황경로? 이 사람은 포철을 경영하기엔 카리스마가 부족하질 않소. 그리고 다른 회사를 많이 옮겨 다녔군요.”

1992107일 노태우 대통령은 신임 포철 회장에 황경로 부회장을 승진 발령할 것을 재가하면서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통령에겐 황경로라는 인물이 생소하기도 했지만 20여년간 박태준 회장의 카리스마적 경영에 길들여진 포철을 이끌수 있을까, 회사를 자주 옮겨 다닌 경력이 내부 승진의 전통을 지켜온 포철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숙고 끝에 황경로 회장, 정명식 부회장, 박득표 사장을 새 포철 경영진으로 편성한다는 내용의 결제서류에 사인했다.

노 대통령은 황경로 회장의 임명이 선뜻 내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황 회장의 인생역정은 박태준씨와 떼어 놓을수 없는 관계였다. 19506·25가 터지면서 장교로 군에 입다한 황경로씨는 1954년말 육군 관리심사처에서 박태준을 처음 만났다. 황씨는 전역 후 대한중석에서 사장으로 임명된 박태준씨를 따라 관리담당 부장으로 보필했다. 1968년 포철 창립멤버로 입사해 1977년까지 10년간 관리담당 상무를 역임했다. 독특한 스타일로 직원을 통솔했기 때문에 그의 주변인물을 옐로() 사단이라 불렀고, 박득표씨가 이 사단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1977년 포철을 떠나 삼성물산 상무, 삼척산업 부사장, 한국자보 사장, 동부산업 사장과 회장을 거친후 1988년 박태준 회장의 부름을 받고 다시 포철로 들어갔다.

 

1992104일 박태준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 지명과정에서 후유증으로 실의를 거듭한 후 김영삼 민자당 총재와 만나 선대위 위원장 고사와 최고위원직 사퇴를 분명히 하고 다음날 포철 회장직에 대한 사표를 제출했다. 포철의 상부는 물론 하부가 극심하게 요동쳤다.

수습의 책임을 황경로씨가 맡았다. 박태준씨가 포철 회장직 사표를 낸 105일 오후 3, 황경로 부회장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 박 회장의 사임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오후 여상환 부사장 등 임원들은 백 회장의 서울 북아현동 자택을 찾아가 임원 전원의 사직원을 첨부한 사퇴철회 건의안을 내고 발목을 잡았다. 같은날 부장급 133명의 사직원이 박 회장에게 전달됐다. 그래도 박태준은 요지부동이었다.

박태준은 자택을 찾아온 간부들에게 타일렀다. “사람은 때가 되면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내가 아무런 힘이 없어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그것(정치권의 포철 개입)만은 막겠다.”

포철과 광양의 제철소 현장도 흔들렸다. 포항에서는 포철 및 자회사의 현장근로자, 부인회 회원등 2천여명이 집결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고, 해병전우회 소속 직원들이 박 회장의 서울 자택을 기습해 읍소했다.

사표 제출 사흘후인 108일 백태준은 명예회장직을 수락한다. 물론 이때 청와대에서 황경로, 정명식, 박득표의 세 경영진에 대해 재가를 한 뒤였다. 당시 포철 간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외부에서 무슨 관제시위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이런 게 포철의 기업문화입니다. 자발적인 시위였지요. 이해구 의원 등 민자당 의원들이 포항에 내려와 이 분위기를 보고 실감했습니다. 19933월 주총에서 외부의 낙하산 인사가 없었던 것도 정부가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태준 회장은 1987년 5월 13일 런던에서 열린 영국 금속학회 연차총회에서 애터톤(D. V. Atterton) 영국 금속학회 회장으로부터 베서머 금상을 수상하고 있다. /포스코
박태준 회장은 1987년 5월 13일 런던에서 열린 영국 금속학회 연차총회에서 애터톤(D. V. Atterton) 영국 금속학회 회장으로부터 베서머 금상을 수상하고 있다. /포스코

 

199212, 중순 미얀마의 양곤 공항.

박태준 명예회장이 트랩을 내려왔다. 미얀마 군사정부의 제2인자인 세인웅 장군은 박태준씨에게 거수경례를 하느가 싶었다. “형놈.”

갑자기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세인웅 장군의 입에서 큰 소리로 한국식 욕설이 나온 것이다.

사연인 즉 세인웅 장군이 미리 미얀마에 입국한 조말수 부사장에게 어떻게 하면 한국식으로 최상의 존경을 표할수 있느냐고 물었고, 조 부사장이 거수 경례와 함께 형님하고 말하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었다. 세인웅 장군의 발음이 나빴던 것이었다.

이어 협상에 들어가 1만톤 규모의 아연도강판공장, 25천톤 규모의 와이어 가공강장 합작사업이 합의되었다. 미얀마 정부에서는 박태준이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정부허가고 뭐고 즉시 다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박태준은 내가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이 잘되면 형님이라 부르고 잘못 되면 형놈이라 불러도 좋다고 농담했다. 세인웅 장군은 전후의 사태를 파악한후 무척이나 당황해하며 발음 연습을 했다고 한다.

명예회장 추대를 수락한 박태준은 1017일 조용경 보좌관을 통해 신당 불참은 물론 정치를 안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뒤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에 칩거하다 115일 장기외유를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가 싫기도 했지만 차제에 그동안 미뤄왔던 해외사업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명예회장으로 재임했던 기간에 박태준은 거의 해외에서 보냈다. 1992115일부터 1218(선거일)까지의 1차 외유에서는 일본 중국 홍콩 베트남 미얀마를 넘나들면서 이른바 남방정책을 추구했고, 그해 1225일부터 이듬해 220일까지의 2차 외유에서는 일본 인도 오스트리아 프랑스 미국을 거치며 세계일주를 했다. 명예회장의 명예가 해외에서 인정받는 기간이었다.

199211월말 중국에서의 일이다. 북경공항에 도착했을 때 리무진 20대가 비행장 착륙지점에 대기했고, 아무런 입국절차 없이 30분간 모든 차량이 통제된 가운데 호텔까지 질주했다. 중국 정부로서는 비록 정치에서 손을 뗐으나 포철 명예회장으로서의 박태준이란 인물을 총통 대우한 것이다.

북경에서 열린 만찬장에는 차세대 실력파로 꼽히는 주룽지(朱鎔基) 부총리는 물론 장관급 8, 차관급 11명이 참석했는데 재계 모임에서 이처럼 고위인사들이 많이 모이기는 전무했다는 것이 당시 중국측 참석자의 얘기였다.

중국에서 박태준은 북경~홍콩간 2km 길이의 고속도로(100억 달러 규모)에 대한 합작 참여를 제의받아 논의했고, 수도강철과 보산제철소로부터 각각 1천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 참여 문제를 협의했다. 박태준은 중국 방문중 수도강철 명예고문으로 추대받기까지 했다.

베트남에서 두 무오이 당서기장을 만나 연산 20만톤 규모의 미니밀 건설을 합의했는데 도 무오이 당 총서기는 이 철강회사의 설립에 박정희 대통령 만큼이나 의욕적이었다고 한다.

한 전직 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박 회장은 정치에 참여한 뒤에도 늘상 남방경제를 구상했습니다. 정부가 실익이 없는 북방정책에 매달려 있을 때지요. 이때 중국 베트남 미얀마 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광양 4기 준공에 따른 공급 과잉을 해소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태준은 국내에서 대선 열기가 들끓을 때 외압에 의한 귀국 저지설이 난무했고 정주영 국민당 대표가 입당을 끊임 없이 권유했으나 끝내 선거일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박태준은 또다시 신변을 정리하고 외유길에 나섰다. 199318일 오스트리아 빈의 대통령궁에서 박태준은 클레스틸 대통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은성대명예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는 1987년 철강업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베세머 금상을 받을 때만큼이나 당시 수훈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시상식 현장에서는 미국의 카네기를 20세기 초반의 철강왕, 한국의 박태준을 20세기 후반의 철강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카네기가 당대에 6백만톤의 생산체제를 건설, 1차와 2차 세계대전에 크게 기여한 유에스 스틸의 모체가 되었다면 박태준은 당대 2,100만톤 체제를 안성,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세기말의 철강왕 박태준. ‘아이언 박이라는 애칭을 가졌던 그는 그야말로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멍들었지만, 나들이 했던 해외여행에서 대접받는 기업인이었다. 그는 외유에서 돌아온 후 명예회장직마저 내던져 버리고 또다시 정처없이 해외로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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