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파워①…냉전 와해 후 ‘금융 패권’ 인식
美 금융파워①…냉전 와해 후 ‘금융 패권’ 인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3 1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가의 로비로 금융개혁법안 성사…은행산업, 집단도산 위기에서 재기

 

1980년대 후반, 미국 금융산업은 집단 도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80년대초 연간 20개 미만이었던 은행 도산 수가 1980년대 후반에는 200개로 확대됐다. 엔화 강세에 힘입어 일본 은행들이 캘리포니아의 은행들을 대거 사들여도, 미국 금융계는 속수무책이었다. 1970년대 세계 30대 은행중 7개를 미국 은행이 차지했으나, 1990년에는 1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10년후, 미국의 은행들은 세계 금융시장을 다시 장악했다. 금융위기에 시달리는 아시아 국가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세계의 금고로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그러면 1990년대 들어 미국 금융산업이 다시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게 된 배경을 무엇일까.

 

미국의 금융개혁에 관한 입법은 1980년대에 시작했지만 본격화된 것은 동서냉전이 와해된 1990년대였다.

1990년대초 최대 적대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 중앙정보국(CIA)글로벌 경제에서 강력한 금융의 힘이 유일한 무기라며 금융 패권을 일본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할 것을 백악관에 건의했다. CIA의 보고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9912월 미국 재무부는 금융산업 경쟁력 약화가 미국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금융산업 체질 개선에 관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동서 냉전 시대에 미국은 군비증강에 몰두했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일본의 경제성장과 아시아 국가의 개발독재를 용인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미국은 군비를 삭감, 재정지출을 줄였고, 금융산업을 선두로 산업경쟁력을 강화했다. 동시에 국제자본시장의 경계를 허물었다. 국제 정치, 경제의 중심이 워싱턴의 펜타곤에서 뉴욕의 월가로 옮겨갔고, 세계의 지도력은 과거 소수 군사엘리트의 판단에서 다수 투자자가 만드는 시장원리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1992년 집권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당시에 마련된 재무부의 보고서를 그대로 이행했다. 1930년대초 대공황 때 만들어진 규제 위주의 금융관련 법률을 대거 뜯어고치는 것을 비롯, 금융산업 규제완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은행의 BIS 자기자본 비율을 강화했고, 주간 은행업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리고 은행과 증권, 보험업무의 업종간 진입장벽을 해제함으로써 금융 부문을 경쟁체제로 전환하기로 하고 법 개정을 추진했다.

 

미국 지도부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1930년대 대공황시대에 만들어졌던 글래스-스티걸 법안을 폐기하고 은행간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1999년초 금융개혁법안이 미 의회에 상정돼 열띤 논란을 벌일 때 의회 복도는 월가의 금융인들로 메워졌다. 월가 로비스트들은 돈을 싸들고 의원들에게 덤벼들었다. 이번 기회에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한해가 더 가면 서기 2000,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상하 양원 선거가 있다. 미국도 선거해가 되면 정치판은 거의 다른데 신경을 쓰지 못한다. 월가 뱅커들은 한해 전에 의회 통과가 무산됐다가 다시 상정된 금융개혁법안이 이번엔 반드시 통과되도록 엄청난 돈을 워싱턴 정가에 뿌렸다. 법안이 통과되면 시티나 체이스맨해튼 은행이 합법적으로 증권업과 보험업에 진출, 이른바 금융백화점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돈이 되는 사업이 눈에 보이는데, 월가 로비스트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법안은 중앙은행(FRB)과 재무부의 밥그릇 싸움,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 백악관과 의회의 설전을 거친 끝에 21세기를 두달여 앞둔 1022일에 마침내 의회의 전격적인 합의를 얻어냈다.

 

록펠러 센터에서 바라본 뉴욕 중심가. 2001년전 사진이어서 세계무역센터가 멀리 서 있다. /위키피디아
록펠러 센터에서 바라본 뉴욕 중심가. 2001년전 사진이어서 세계무역센터가 멀리 서 있다. /위키피디아

 

미국의 금융개혁법안은 월가의 치열한 돈 로비가 가져온 결과였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로비 자금이 월가에서 워싱턴 정가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역사상 하나의 사안으로 이처럼 거액의 로비자금이 소요된 적이 없었다.

1998년 상하양원 선거에만 약 3억 달러 이상이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타임스지에 따르면 이 기간 금융개혁법안을 지지하는 의원 후보에 5,800만 달러를 썼다. 또 공화, 민주 양당에 8,700만 달러를 기부했고, 공식 정치자금으로 포함되지 않는 기타 로비자금으로 16,300만 달러였다.

의료보험법안도 미국에서 치열한 로비에 의해 성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안 통과를 위해 미국의 병원 등 의료관련 업계는 1997년과 9823,000만 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안은 2년간의 집중적 로비로 성사됐다.

이에 비해 금융개혁법안은 1980년대초에서 시작, 20년이 걸린 점을 감안하면 로비자금 금액이 10억 달러는 간단히 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가 은행을 대표해서 의회 설득작업에 나섰던 미국 은행협회(ABA)의 로비스트 에드 잉글링(Ed Yingling)씨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쎄요, 금액이 얼마인지 계산하기조차 어렵군요. 우리가 입법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그 많은 돈이 그냥 사라졌을 것입니다. 금융 개혁법안은 우리(금융업)의 최대 이해관계가 얽힌 법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고, 로비 자금은 우리의 싸움에 필요한 이빨이요, 손톱이었습니다.”

하원 금융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나중에 상원 의원에 출마한 뉴욕주 출신 척 슈머 의원(민주)은 은행들의 집중적인 로비대상이었다. 그는 이래저래 1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월가 은행들로부터 받아썼다. 또 보험업의 중심지인 커네티컷주 하트포드 출신 상원의원 크리스토퍼 도드씨도 30만 달러 이상을 보험회사에서 받아 선거 자금으로 썼다.

월가의 치열한 로비는 상하 양원 금융위원회를 무너뜨렸고, 드디어 70년전에 만들어진 글래스-스티걸 법안의 폐기에 성공한 것이다.

 

미국의 금융개혁법은 대공황때 만들어진 글래스-스티걸(Glass-Steagall) 법안을 폐기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다. 대공황 이전에는 미국의 금융산업엔 경계가 없었다. 상업은행이 증권업과 보험업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공황이 터지고, 바로 이 법안이 장기불황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당시 미국 금융계를 쥐고 흔들었던 JP 모건은 상업은행과 증권업, 보험업, 부동산 신탁업 등을 망라하며, 뉴욕 월가를 지배했다. 문제는 JP 모건이 은행의 돈을 가져다 주식 투자를 했고, 주식 투자에서 번 돈으로 다른 은행을 사는 과정에서 금융 시장에 극심한 통화 팽창이 생겨 정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공황 직후 집권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금융기관 사이에 벽을 만들어 은행과 보험회사 돈이 증권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를 위해 금융산업의 장벽을 만들기로 하고 입법을 추진했다. 바로 글래스-스티걸 법안이었다. 1933년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의회가 입법한 가장 중요하고 원대한 법안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글래스-스티걸 법안은 비상시의 법안이었다. 50여년이 지나 미국 경제 볼륨이 커지면서 미국 금융산업이 유럽과 일본등 경쟁국에 밀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의 대대적인 금융산업 규제 완화는 금융업계의 재편을 예고했다. 뉴욕 월가로 대변되는 미국 금융산업은 살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 금융금융기관들은 자구책으로 선택한 방법은 업종간 벽 허물기와 합병 및 인수(M&A)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