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 인조반정 세력이 칼을 씻던 곳
세검정, 인조반정 세력이 칼을 씻던 곳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1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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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화재로 소실, 1977년 복원…아래 홍제천에선 私草를 씻어 재활용

 

 

상명대 입구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5분 가량 올라가면 냇가 큰 바위에 정자가 있다. 북한산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이 홍제천을 이뤄 내려가면서 경치가 아름답다. 세검정(洗劍亭)이다.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이 정자는 원래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과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는 설이 교차한다.

어쨌든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인 만큼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법한데, 서울시 기념물 4호로 격이 한층 낮게 분류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인 1941년에 소실되었다가 1977년에 복원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멸실된 유적을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해도 문화재로 인정하지 못한다. 복원된 남대문만 국민 정서를 고려해 국보1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본 정자는 세검정 터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검정은 없다. 그래서 국가문화재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검정 /김현민
세검정 /김현민

 

세검정이라는 이름은 칼을 씻는 정자라는 뜻이다. 광해군 15년 이(李貴), 김류(金瑬) 등이 광해군 폐위를 의논하고 이곳 홍제천에서 칼을 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지닌다.

영조 임금은 재위 19(1743)에 세검정에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창의문에 들러 옛 인조반정의 일을 회고하면서 시를 짓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걸게 했다. 영조 24(1948)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 방위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케 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삼았다고 한다.

 

세검정 /김현민
세검정 /김현민

 

세검정 터 인근은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를 만드는 기술자가 상주하면서 메주가마골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기록에 따르면 사관들이 역대 왕들의 실록을 완성한 후에 세검정 냇가로 와서 세초(洗草)하였다고 한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을 없애는 일로, 간혹 불태우기도 했으나 보통은 종이에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하였다. 종이가 귀하던 시대였다. 그러한 세초를 굳이 세검정 아래 홍제천에서 행한 이유는 이곳에 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 화재가 나 주춧돌 하나만 남고 불탔다. 일제시대에 이곳 종이공장에서 불이 나 세검정이 탔으니, 종이와 관련이 있는 곳인가 보다. 그러던 것을 서울시가 예산을 마련해 1977년 복원했다. 주소지는 종로구 신영동이다.

 

홍제천 냇가의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작은 정자다. 풍광이 좋아 예로부터 선비들이 세검정 그림을 많이 그렸다.

겸재 정선은 부채에 세검정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주변 산자락이 발을 담그고 있는 계곡물이 너럭바위 사이로 넉넉히 흘러내리고 그 옆 높직하고 널따란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오롯하게 그려져 있다. 세검정을 복원할 때 겸재의 그림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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