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파워⑦…국경 없는 투자자
美 금융파워⑦…국경 없는 투자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0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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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투자자들,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엄청난 이윤 챙겨

 

낸시 스테슨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무장경관이 수색하기 때문에 짐을 실어주지 않겠다는 택시 운전사와 싸워야 했고,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는 미국 기업인이 게릴라에 납치돼 시끄러웠다. 여성의 몸에도 불구, 그녀는 잠비아, 에스와티니왕국(옛 스와질랜드) 등 아프리카 오지에서 호주까지 한해에 20여개 나라를 다니는 것은 수익성 높은 개도국 주식시장을 찾기 위해서다. 그녀의 직업은 신탁관리인. 고객이 맡겨놓은 자금을 가장 높은 수익을 내는 곳에 투자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뉴욕 월가에는 자금이 넘쳐난다. 미국 주식시장은 뛸 만큼 뛰었고, 미국에만 투자했다가는 만일의 폭락에 대비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월가 투자자들은 해외주식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미국 시장보다 주가 상승률 이 높은 나라의 증시, 미개척 시장에 그들의 표적이다. 투자자금의 10~20%는 해외에 분산 투자하는 것이 포트폴리오 구성상 안전하다는 것이 월가의 철칙이다.

 

월가 투자자들에겐 국경이 필요 없다. 반군 게릴라들이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막강한 달러의 힘을 앞세워 해외시장을 넘나들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주식시장이 개설된 나라가 40~50개에 불과했으나, 1997년에는 125개국으로 늘어났다. 유고연방 해체로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마케도니아(현재는 북마케도니아공화국)에도 주식시장이 개설돼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마케도니아에서의 투자법을 소개한 바 있다.

월가 투자자들은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해외에 투자하기 때문에 개방이 덜 된 나라, 기업 회계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나라,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에서는 갑자기 투자자금을 회수한다. 아시아 외환위기, 이에 앞선 멕시코 위기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발생했다.

월가 뱅커의 영향력은 유럽에서도 막강하다. 유럽 기업들이 대형 합병을 중개하는 것은 투자은행이 아니라, 월가의 브로커들이다. 이탈리아 크레디토 이탈리아노사가 크레디토 로마뇰로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시도할 때 JP 모건, 골드만 삭스등 월가 브로커 회사들이 대리인으로 나섰다. 영국 애비 내셔널 은행이 3억 파운드의 전환사채를 발행하려고 했을 때 메릴린치가 나섰다.

월가로 대변되는 미국 자본은 유럽과 일본의 자본에 비해 유동 속도라 빠르고 투기성이 강하다. 월가 은행들은 1997년 상반기부터 아시아의 성장률이 둔화될 것으로 판단해 아시아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런데 유럽과 일본 자금은 같은 기간 아시아에 대한 투자 규모를 늘려 손해를 보았다. 1998년 상반기 아시아 경제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자, 가장 먼저 들어온 자금은 월가의 자금이었다.

아시아 위기가 터지자 월가 사람들은 불타고 남은 자산을 값싸게 사기 위해 덤벼들었다. 월가에서는 처분세일(Fire Sale)’ 상품을 사려고 덤벼드는 자본을 독수리(Vulture)에 비유해 벌쳐 자본(Vulture Capital)이라고 부른다. 월가의 벌쳐 자본은 일본과 한국, 인도네시아의 공중을 빙빙 돌며 죽었거나 죽어 가는 은행, 기업, 부동산에 날라와 먹어치웠다.

월가 자본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를 열었고,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 다국적 자본으로 전환한 월가 은행들은 민족국가 단위의 정부와 노동자를 뼈아픈 패배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안방에서 외국 주식을 살수 있다. 뉴욕증시에 상장한 외국 회사의 주식예탁증서(DR:Depositary Reciepts)를 사면 된다. 미국인들은 세계 최대 증시를 보유하고 있는 장점을 누리고 있고, 외국 기업들은 뉴욕의 풍부한 자금 시장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19991117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두루넷이라는 한국의 인터넷 회사가 나스닥에 상장됐을 때 뉴욕 월가의 투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청약 경쟁률이 221을 넘었다. 홍콩의 차이나 컴(China.com)’이 상장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 투자자들이 뉴욕 증시에 상장한 외국기업 주식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가 있다.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외국 기업이라면 적어도 그 나라에서 블루칩이거나,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다. 또 까다로운 미국 증권 법규를 준수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현지 투자에서 안아야 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종목을 잘 선택하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국의 두루넷 주가가 나스닥 첫거래에서 공모가의 두배로 폭등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같은날 스페인의 인터넷 회사 테라 네트워크가 나스닥에 데뷔 했는데, 하루만에 거래가격이 공모가의 세배나 폭등했다. 스페인어권의 인터넷 시장에 대한 잠재력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DR의 규모가 급증했다. 미국 증시 투자자들에겐 해외 기업 선택의 폭이 커졌고,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반증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와 나스닥 거래소에 상장된 외국 기업의 DR의 종류는 1990년에 176개였으나, 1998년말 현재 505개로 늘어났다. 다우존스사가 선정한 유럽의 블루칩 50개 종목중 29개가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다. 뉴욕 증시에 상장되지 않은채 장외에서 거래되는 외국 기업도 많다. 상장회사와 비상장회사를 합쳐 뉴욕에서 거래되는 외국 주식은 1998년 현재 1,415개로 90년의 836개보다 1.7배 증가했다.

미국인들의 해외주식 매입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이뤄진다. 첫째는 해외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뮤추얼 펀드를 통해 현지 증시에서 원주를 매입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뉴욕 증시를 통해 외국 기업의 DR을 사는 경우이다.

미국인들의 해외주식 보유액중 외국 현지에서 원주를 산 비율이 여전히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최근엔 뉴욕증시에서 DR을 직접 사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시티그룹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해외주식 보유액중 DR 보유비율이 1994년에 23%였으나, 98년엔 36%로 높아졌다.

은행에 저축하기보다 주식을 사두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성향은 해외 주식 매입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1998년을 기준으로 할 때 미국인들의 해외주식 매입액(9,325억 달러)중 한국 투자(35억 달러) 비율은 0.37%에 불했다. 15조 달러나 되는 월가의 저수지에 비교할 때 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한 금액은 0.02%로 뚝 떨어진다. 한국에선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려와 주식시장이 뜬다, 어쩐다 해도 월가 투자자들에겐 큰 양동이에 물한방울에 지나지 않는 미미한 액수다.

만약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이 아주 좋아져 월가 투자자들이 한국에 봇물처럼 밀려올 경우엔 정말 큰일이다. 한국 종합주가지수가 2,000 포인트를 금방 넘을 것이고, 한국 주식투자자들은 금새 좋아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 그들이 빠져나갈 때 나타날 패닉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한 반드시 반가워 해야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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