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의 흥망②…納弊乞和, 돈 주고 평화 구걸
宋의 흥망②…納弊乞和, 돈 주고 평화 구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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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內虛外, 외적의 위협은 타협하고 국내 안정에 주력하는 정책으로 영토 상실

 

중국 북송 2대 태종은 북쪽의 거란족 73 가구가 귀순해오자 매우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에 외환이 없다면 반드시 내환이 있기 마련이다. 외환이 변경에서 그친다면, 예방가능한 일이다. 내환이 발생해 간사한 자들이 설친다면 심히 두려운 일이다. 이를 조심해야 한다.”

그는 외환은 방어역량이 충분하다면 변경의 충돌로 그치지만, 내환은 방비가 어려우며, 따라서 두려운 일로 여겼다. 국가존망의 문제는 외환(外患)이 아니라 내우(內憂)라는 것이다.

이를 송()수내허외(守內虛外) 정책이라고 한다. 외부 적의 공격은 적당히 타협해 조정하되, 내부의 반란, 정적 제거에 주력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으로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여진족의 금()이 침공해왔을 때 돈으로 평화를 사는 납폐걸화(納弊乞和)의 굴욕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종국엔 몽골족의 원()에 멸망하게 된다.

 

북송의 영토 /위키피디아
북송의 영토 /위키피디아

 

송의 수내허외 정책은 태생적이다. 앞서 한족 통일국가인 당()나라가 안록산·사사명의 난, 황소의 난, 절도사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그후 53년의 짧은 기간에 510국의 분열기를 거치면서 중원에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5개 단명왕조가 나타났다. 이를 통일한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무신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문신을 양성했으며, 지방의 병력배치를 줄이고 중앙군을 강화했다. 그 스스로도 배신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무신들에게 병력을 주면 언젠가 배신을 때려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걱정했다. 황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되도록 무신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군사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것이다. 당연히 국경엔 파견된 군사력은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약화되었다.

조광윤의 동생이자 2대 태종인 조광의도 무장의 자리를 문신으로 충당하고, 환관을 이용해 군대를 지휘하고 감독하게 했다. 송나라 초기 황제들은 무장의 병력을 몰수하고 문신들의 주장에 귀를 귀울이며 황실의 지속적인 권력유지에 주력했다. 적은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것이다.

송나라는 태조와 태종을 거치면서 10개로 갈라진 한족 지방정권들을 정복하면서 통일왕국을 수립했다. 요나라 수중에 넘어가 있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의 연운(燕雲) 16주만 남겨두고 있었다.

 

중원에서 송나라가 건국할 무렵, 북방 내몽고 지역에서는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세력을 확장했다. 9세기 후반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에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 틈을 타 거란족 일파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카간(可汗)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916년 스스로를 황제라 부르며 거란국(契丹国)을 세웠다. 거란은 이어 연운16주를 확보한 후 나라 이름을 요()로 바꿨다.

송 태종은 하북지역으로 공격해 연운16주를 수복하기 위해 두차례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가 고량하(高梁河) 전투였다. 979년 송 태종은 북한(北漢) 정벌의 기세를 몰아 북경근처 고량하에서 요나라와 결전을 벌였다. 송군은 초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요나라의 속임수와 협공에 밀려 참패했다. 송 태종도 몸에 화살 두 대를 맞고 달구지를 타고 개봉으로 후퇴했다.

3년뒤 982년 요나라에 12살 어린 나이의 성종이 즉위하자 송 태종은 이를 만만히 여겨 다시 하북 지역을 공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986년 송 태종은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눠 요를 공격했지만 기구관(岐溝關)에서 또다시 참패를 당했다. 지휘관 실수도 있었지만 문약(文弱)한 송나라 군대의 허약함이 드러난 것이다.

 

연운 16주 /바이두백과
연운 16주 /바이두백과

 

요나라와의 두차례 전투에서 참패한 송나라는 군사력으로 국토(연운16)를 수복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수내허외정책을 기본국책으로 확립하게 된다.

수내허외 정책을 시행하면서 송 조정은 국경의 장수들에게 오랑캐 지역을 공격하지 말고 적이 쳐들어오면 성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수성전(守成戰) 지침은 미수복 연운16주를 포기하되, 지금의 국토만 지키라는 의미였다. 그 일환으로 동서 900여리 국경에 26개의 성채와 125개 군포(軍飽)를 설치하고, 해안 포구에 3,000명의 수군을 배치했다.

만일 북방의 기마민족이 침략해 오면 진지를 사수하고 주변의 건물과 수목, 곡식을 제거하는 청야(淸野) 작전을 펴도록 했다. 오랑캐가 쳐들어 와도 약탈할 것이 없어 며칠 내에 돌아가도록 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장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장수들은 적이 침공하면 성 밖으로 나가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싶어했다. 아무리 문약한 나라였지만, 송나라에도 장수다운 장수는 늘상 있었다. 995년 요나라 군대가 두차례 침범했을 때 일부 장수들은 성 밖으로 나가 적을 격퇴하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송 태종은 이들이 군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임지에서 내쫓았다. 장수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적이 와도 송군은 성채 위에서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오랑캐들은 하북과 산동에 깊숙이 들어와 지나는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양민을 학살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래도 송군은 병영을 닫아걸고 진지를 굳게 지킬 뿐이었다. 적의 약탈을 허용한 것다. 백성들의 생명이 위태롭고 재산이 빼앗기더라도 오랑캐들은 필요한만큼 챙기고 돌아가게 하는 것도 전략인가. 백성이 죽든살든 황실만 살면 된다는 송 지배층의 이기적 발상이었다.

 

태종이 죽고 아들이 진종이 즉위하면서 수내허외 정책을 강화했다. 문신들은 앞을 다투어 요나라와 전투를 벌일 게 아니라 유화정책을 채택하자고 건의했다.

주대부(朱臺符)라는 대신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요나라와의 악연을 씻어버리고 동맹 관계로 회복하고 재화를 교환함으로서 서로 이롭게 하기 위해 관시(關市)를 허락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관시는 국경의 무역도시를 말한다. 병중에 있던 조빈이라는 대신도 요나라와의 화친을 건의했다.

이러한 정보가 요나라에 들어갔다. 요나라는 갈수록 송 나라를 만만하게 보았고, 더욱 난폭해졌다. 요나라는 국경에서 소규모 충돌을 벌여 송의 반응을 떠보다가 100420만의 대군을 보내 침공했다. 전방의 송나라 장수들은 급보를 띄우며 황제의 친정을 요구했다. 그런데 송 진종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문신들은 금릉(金陵, 난징) 또는 쓰촨(四川)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구준(寇準)이라는 명재상이 있었다. 구준은 황제에게 천도 주장을 하는 대신의 목을 베고, 황제가 친히 정벌에 나가 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민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진종은 마지 못해 친정에 나서자 군의 사기가 오르고 백성들이 환호했다. 송을 압도하려던 요나라 대군은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퇴각해 국경선에서 대치했다.

 

이 무렵 송과 요 사이에 비밀리에 협상이 시도되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제의했는지는 사료가 분명치 않은데, 상황을 보면 양쪽 모두가 협상을 원했다. 요도 침략이 뜻대로 되지 않아 피로감이 돌았고, 송 조정에도 협상파가 많았다.

재상 구준은 끝까지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황제는 협상을 원했다. 진종은 조이용(曺利用)이란 자를 대표로 보내 협상케 했다. 수차례의 강화회담이 실패했다. 요는 송군의 위용이 대단한 것을 파악하고 슬며시 타결의 기미를 흘렸다.

송 조정은 이를 간파했다. 송 진종은 이렇게 말했다. “영토를 달라고 하는 것은 받아 들일수 없다. 그들이 영토를 고집한다면 결전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요에게 매년 약간의 재화를 주어 그 부족액을 메울수 있다면 조정에도 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조이용은 황제에게 물었다. “만약 그들이 재화만 요구한다면 얼마를 대답하면 될까요.”

송 진종은 필요한 상황이라면 100만도 응락하거라고 답을 주었다.

조이용이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나가는데 재상 구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구준은 황제께서 100만을 허용했을지라도 그대는 30만을 초과해서는 안되오. 30만을 초과하면 그대는 나를 보러 올수 없소. 내가 그대를 죽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협상은 타결되었다. 조이용은 구준이 못 박은 30만으로 요를 설득했고, 요도 그 정도면 족했다. 송나라가 요나라에 매년 은() 10만냥, 비단 20만필을 주기로 했다.

 

조이용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와 행궁을 찾았다. 진종은 그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황제는 내시에게 해마다 얼마의 세폐(歲幣)를 주기로 합의했는지를 알아오라고 했다. 조이용은 황제 이외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줄수 없었기에 환관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었다. 환관은 잘못 알아듣고 식사 중인 황제에게 대략 300만이 아닌가 하옵니다고 전했다.

진종이 놀라 너무 많다. 너무 많아하면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쟎아. 이 돈으로 일을 처리할수 있다니, 괜챦은 편이다고 넉두리했다고 한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조이용은 황제가 너무 많아라고 하는 소리만 듣었다. 그는 황제 처소에 들어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수락한 내용이 너무 많았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진종은 정확히 얼마냐고 물었다. 조이용은 “30만입니다고 했다. 진종은 뜻밖의 횡재를 얻은양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그후 조리용은 후한 상을 받고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전연의 맹약 /바이두백과
전연의 맹약 /바이두백과

 

이어 송나라와 요나라는 정식으로 화친조약에 서명했다. 이때 조약을 맺은 장소가 전연(澶淵)이란 곳이었고, 그때 조약을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이라 한다. 그후 송나라는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은과 비단을 수탈해 요나라에 바쳤다.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났고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요나라 통치자들은 송나라를 약탈하지 않는 대신에 해마다 은과 비단을 받게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만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1042년 요나라는 다시 출병해 남쪽을 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송 진종은 지레 겁을 먹고 사신을 보내 해마다 은 10만냥, 비단 10만필을 더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한번의 굴욕으로 그치지 않고 더 심한 굴욕을 겪은 것이다.

전연의 맹약은 태종의 수내허외(守內虛外) 정책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돈으로 생존과 평화를 구걸하는 납폐구존(納弊求存)이자, 납폐걸화(納弊乞和)의 시초다. 이로써 송나라는 영원히 연운16주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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