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덕분에 임금자리에 오른 신라 원성왕
날씨 덕분에 임금자리에 오른 신라 원성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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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폭우에 왕위 계승자가 강물에 막혀 오지 못하자 쿠데타로 집권

 

고대 신라시대는 하늘만 쳐다보고 살던 시대였다. 비가 오면 농사가 잘 되어 백성들은 풍년가를 불렀고, 가뭄이 계속되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하늘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하늘의 미움을 받아 백성들을 굶주리게 했던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임금을 원성대왕이라 높여 불렀지만, 그의 시대의 기록을 보면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자자한 임금이었을 뿐이다.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怨聲)이다. 신라 김씨 왕조의 세습이 확고해진 17대 내물왕 12대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아 왕족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적통에서 한참 갈라진 방계에 불과했다. 당연히 왕위 서열에 낄수도 없는 군번이었다. 그런 인물이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그가 임금이 되기 5년전인 780년이다.

36대 혜공왕 재위 시절(765~780)에는 귀족계급이 분열하면서 유독 반란이 잦았다. 대공(大恭대렴(大廉) 형제의 반란(768), 김은거(金隱居)의 반란(775), 염상(廉相정문(正門)의 반란(775) 김지정(金志貞)의 반란(780) 등이다. 혜공왕은 여덟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을 했는데, 귀족들이 어린 임금을 만만히 본 것이다.

 

경신은 혜공왕 말년(16)의 반란에 가담했다. 780년 왕족인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대편 대신인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측을 지지해 방어했다. 김양상 측의 군세가 약한 듯 했다. 이에 김양상은 경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도와 김지정의 반란을 제압한다. 이 와중에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었다.

어느 쪽이 혜공왕을 죽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 혜공왕조(777)를 보면, 상대등 김양상이 시정(時政)을 극렬히 비판했는데, 혜공왕은 이찬 김주원(金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혜공왕과 김양상 사이에 갈등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어쨌든 혜공왕이 죽자 김양상이 임금이 되니, 그가 37대 선덕왕(宣德王)이다. 선덕왕은 오래 살지 못했다. 즉위 초기부터 지병이 있었던 것 같다. 37대 임금은 재위 5년만에 병사했다.

선덕왕에겐 아들 없었다. 임금 자리를 놓고 또다시 귀족들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질 상황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주원(周元)을 새 임금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주원은 욍위승계 서열 1위인데다 계급도 시중으로, 경신보다 위에 있었다.

 

경신의 역심은 선덕왕이 죽기 이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내용은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날 경신은 머리에 쓴 복두(幞頭)를 벗고 흰 갓(素笠)을 썼는데, 열두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주변에게 물어보았더니 복두를 벗은 것은 벼슬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조짐이다고 해석했다.

그 해석을 듣고 경신은 낙심했다. “임금이 되고 싶었는데, 감옥에 가게 되다니.”

그때 여삼(餘三)이라는 자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복두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입니다.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 후손까지 왕위가 전해질 조짐입니다. 천관궁의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옳거니, 경신은 자신이 바라던 해몽이 나왔으니 기뻤다. 그래서 또다른 걱정을 토로했다. “내 위에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르겠소?” 여삼이 대답했다. “북천신(北川神)에게 몰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북천은 주원의 집 근처를 흐르는 강이다. 경신은 그의 말에 따라 북천신에 제사를 드렸다.

경주 북천은 신라시대에 알천(閼川)이라고 했다. 언어학자들은 알천을 아리수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는데, 수도의 중심강이라는 의미다. 알천은 물 흐름이 급하고 자주 범람했다.

 

경주시 북천 /경주시
경주시 북천 /경주시

 

때가 왔다. 선덕왕이 급사했다. 경쟁자 주원의 집은 궁궐에서 북쪽으로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권력은 칼 끝에서 나오고, 궁궐을 먼저 장악하는 자가 승리한다.

그 때 폭우가 쏟아졌다. 때는 1(음력)이었는데, 겨울철에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오는 것은 우리 기상에 드믄 일이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궁궐 주변인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썼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아마도 경신의 측근이 말했을 것이다. 또 경신은 이 폭우를 기회로 무장을 한 채 귀족들을 협박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경신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해서 경신은 임금 자리에 올랐으니, 38대 원성왕이다. 경신의 등극은 일종의 찬탈이고, 쿠데타라 할수 있다.

그는 왕위 계승자가 홍수가 난 강을 건너지 못하는 며칠의 짧은 시기를 이용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주원은 제 날짜에 궁궐에 도착해 즉위한 다음 군권을 장악했을 것이고, 그때 경신이 불만을 품었다 해도 반란에 그쳤을 것이다. 날씨가 그의 왕위 찬탈을 도와주었다.

 

경주 시내 /다음 지도
경주 시내 /다음 지도

 

임금에 오르지 못하고 쫓겨난 주원은 명주(溟州, 강릉)로 물러나 살았다. 반정세력들은 정권 장악후 정적들을 죽이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원성왕이 주원을 죽이지 못한 것은 그의 세력을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원은 영동지방에서 사실상 지역군벌을 형성한다.

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임금이 되지 못한 것에 반발해 822년 웅천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면서 국가를 참칭했다. 한때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차지하며 큰 세력을 형성했지만, 중앙군의 공격에 김헌창의 반란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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