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의 흥망③…주화파에 귀 기울다가 金에 패망
宋의 흥망③…주화파에 귀 기울다가 金에 패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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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 말 듣지 않고 간신과 도사의 궤변에 빠져 북송 멸망…정강의 변

 

송대에 만주에 살던 여진족은 숙여진(熟女眞)과 생여진(生女眞)으로 분류되었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말갈(靺鞨)의 후예로 파악된다. 숙여진은 송()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부분적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생여진은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을 하던 원시 종족이었다.

금 태조 아골타 /위키피디아
금 태조 아골타 /위키피디아

 

그 중에서도 아무르강(흑룡강)과 우수리강 일대 험지에 살던 완안부(完顔部)라는 부족에 아골타(阿骨打)1113년에 추장이 되었다. 변방에 뿔뿔히 흩어져 살던 기마부족들은 걸출한 지도자가 나오면 급속하게 단결한다. 그 무렵 만주를 지배하던 요()나라는 여진족을 강압적으로 수탈했다. 거란족의 요는 여진족에게서 인삼, 수달, 진주 등 특산물을 가져가면서 터무니 없이 가격을 후려쳤다. 아골타는 여진족의 불만을 이용해 요나라 국경을 쳐들어가 승리를 거두었고,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일대를 점령했다.

이에 격분한 요의 천조제(天祚帝)10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쳤지만 아골타의 37백명 군사에게 패했다. 1115년 한낱 추장에 불과했던 아골타는 국호를 금()으로 정하고 황제에 등극했으니, 금의 태조(太祖). 중국 정사로 인정되는 금사(金史)에는 아골타의 선조가 경주김씨로 고려에서 이주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 나라 이름을 금()이라 한 것도 선조의 성씨를 이어받았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요에 연운 16주를 빼앗기고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던 송나라는 요의 북방에 강력한 이민족 국가가 형성된 것을 반겼다. 송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사용하기 알맞은 형세가 되었다.

 

송 휘종(徽宗)은 금의 군사가 요의 군사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나라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되찾기로 결정했다. 이 때 요나라의 마식(馬植)이라는 장군이 송에 투항했다. 마식은 요를 치기 위해 발해만(渤海灣) 건너 금나라와 연합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권했다. 송 휘종은 금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고, 금 태조도 이에 동의했다. 이 약속을 해상의 맹약’(海上盟約)이라 한다. 내용은 송과 금이 동시에 출병해 요나라를 협공하고,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주던 세폐를 금나라에 준다는 것이었다.

1122년 약속대로 금이 출병했다. 금군이 만리장성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송군은 보이지 않았다. 금군은 서진해 요의 서경(西京)을 점령하고 요의 수도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을 향해 남하했다. 요의 천조제는 도망치면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연경유수 야율순(耶律淳)에게 용상을 물려줬다.

뒤늦게 출병한 송군은 요군과 맡붙었으나 패했다. 요군은 금군에 무기력했지만 송군은 패전한 요군에 무참하게 패배했으니,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송군은 요나라 병사들을 보자마자 뿔뿔이 도망쳤고, 송 휘종은 부랴부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요의 아율순이 병사하자 송 휘종은 다시 출병을 명령했다. 이때 요나라의 장군 곽약사(郭葯師)가 송에 투항했다. 곽약사가 알려준 내부정보를 활용해 송군은 연경을 쳤지만 아율순의 황후가 군사를 지휘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송군은 절반 이상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 했다.

번번히 요군에 패하자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연경으로 진격하라고 요청했다. 11231월 아골타의 금군은 연경을 점령했다.

송은 금군의 힘을 빌어 숙적 요를 격퇴했지만 연운 16주는 되찾지 못했다. 송 휘종은 사절을 보내 연운 16주 중에 몇 개주라도 돌려달라고 금에 요청했다. 금은 연경과 탁주, 이주, 단주, 순주, 경주, 계주등 6개주를 송에게 주면서 그 댓가로 백은 20만냥, 비단 30만필과 함께 세금 백만관을 달라고 요구했다. 송은 요구대로 돈을 주고 16개 중 6개만 되찾았다.

 

송 휘종(왼쪽)과 흠종 초상화 /위키피디아
송 휘종(왼쪽)과 흠종 초상화 /위키피디아

 

1125년 요의 천조제가 금에 의해 포로로 잡히면서 요나라는 멸망했다.

요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요의 관원이었던 장각(張覺)이란 자가 재빨리 금에 투항했다. 장각은 금군이 자기 나라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납치하는 것을 보고 금을 배반하고 송나라로 도망쳤다. 송 휘종은 장각을 중히 쓰면서 절도사로 임명했다.

장각의 배신에 본노한 금은 장각을 돌려달라고 송에 요구했다. 물론 군사적 위협도 했다. 송 휘종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장각을 죽였다. 장각의 머리는 금에 바쳐졌다.

송나라에 투항해 왔던 요나라 장병들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앞서 투항한 곽약사도 송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게 되었다.

 

이 무렵 금 태조 아골타가 죽고 그의 동생 오걸매(吳乞買)가 등극했으니, 금 태종(太宗)이다. 112510월 금 태종은 종한(宗翰)과 종망(宗望)을 대장군으로 삼아 송의 수도 변경(汴京, 카이펑)을 향해 진군했다. 길 앞잡이는 요나라에서 송나라로 투항했던 곽약사였다.

송의 민심이 술렁거렸다. 연약한 황제는 서둘러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났으니, 북송의 마지막황제 흠종(欽宗)이 엉겹결에 등극하게 된다.

이듬해 1월 금 병사들은 황허 북안에 이르렀고, 송 휘종과 간신배들은 분노한 백성들의 돌팔매를 맞지 않으려고 향불을 피우러 간다는 구실로 남쪽으로 도망쳤다. 새로 황위에 오른 흠종과 재상 백시중(白時中)과 이방언(李邦彦)도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다.

망하는 나라에도 충신은 있다. 이강(李綱)을 비롯해 장수들은 수도를 지키며 싸울 것을 황제에게 주장했다. 흠종도 장수들의 기세에 밀려 변경성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이강이 조정에 나가니 흠종은 마차를 마련해 놓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강은 황제 주변의 금위군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성을 사수하겠는가, 아니면 도망치겠는가.” 병사들이 일제히 사수하겠다고 대답했다. 이강은 흠종에게 말했다. “백성들을 성 안에 놓아두고 어디로 가려는 것입니까.” 흠종은 흠칫하며 되돌아 섰다. 이강은 병사들에게 말햇다. “황제가 성을 지키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도망가려는 자는 누구든 목을 벨 것이다.”

곧이어 금군이 배를 타고 변경성을 공격했지만 송군이 완강하게 버티자 돌아갔다. 금군은 변경성의 수비가 갖춰진 것을 보고 화친을 제의했다.

 

금의 침공과 송의 방어 /위키피디아
금의 침공과 송의 방어 /위키피디아

 

금나라가 제시한 화친 조건은 태원(太原), 하간(河間), 중산(中山) 등 세지역을 떼주고 금 5백만냥, 5천만냥, 마소 1만마리, 비단 백만필을 바치고, 금 황제를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강은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황제와 대다수 대신들은 배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금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송 조정은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보화를 긁어 모았지만 수량을 채우지 못했다. 이 무렵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요평중(姚平仲)이라는 장군은 이 기회에 금 장수 종망을 사로잡자고 제의해 흠종은 마지 못해 수락했다. 하지만 그 기밀은 금에게 누설되었고 출정 부대는 참패를 했다.

금나라 종망이 사신을 파견해 항의하자. 간신 이방언은 이강과 요평중이 저지른 일이지 조정의 의도가 아니다고 둘러댔다. 흠종은 금 군영에 사신을 파견해 사건의 전말을 해명하고, 내놓겠다고 한 세 성의 지도를 바치고 이강을 파직시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주민들은 격분을 참지 못했다. 태학생 수백명이 황궁 앞에 모여 이강의 관직을 회복시켜달라고 청원했다. 마침 이방언이 조정으로 나가던 중 수만명의 군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중들은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돌맹이를 던졌다. 군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궁궐로 밀고 들어가려 했다.

흠종은 겁이 나 궁궐 깊숙이 숨어서 어서 이강을 들라고 지시했다. 황명을 받은 한 환관이 미적미적 걸었다. 환관의 태도에 화가 치민 군중들은 수십명의 환관들을 때려 죽였다. 흠종은 하는수 없이 이강을 복직시킨다고 반포하고 간신히 민심을 수습했다.

 

금 태종상 /위키피디아
금 태종상 /위키피디아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에 아버지 휘종이 수도로 돌아왔다. 황실과 조정은 이제 평화가 왔다고 착각하고 다시 사치와 방탕의 세월을 보냈다. 각지에서 올라온 지원군도 모두 돌려 보냈다. 오랑캐들은 몇푼 쥐어주면 만족해서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섣부른 판단이었다.

송의 황실은 관직을 복권시킨 이강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변방으로 좌천시키고 말았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11268월 금 태조는 종한과 종망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군을 명령했다. 또다시 각지에서 송의 지원군들이 몰려왔다. 주화파들은 지원군의 집결이 금나라를 자극한다며 돌려 보냈다. 황실과 조정은 이번에도 땅 조금과 돈 몇푼 주면 되겠지 생각했다.

금군은 황허를 건너면서 황허 이북 땅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송 흠종은 금의 요구대로 황허 이북을 주겠다고 전하고, 그곳 백성들에게 성문을 열고 금나라에 투항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대신이 투항을 전달하러 갔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주전파들은 남은 군대만으로도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때 국방장관격인 병부상서 손부(孫傅)란 자가 괴상망측한 발상을 황제에게 제의했다. 도술로 적을 물리칠수 있다며 곽경(郭京)이라는 도사를 황제에게 소개했다.

곽경은 황제에게 육갑법(六甲法)을 써서 7,777명의 병사만 있으면 금나라 장수 종한과 종망을 사로잡을수 있다고 말했다. 흠종은 그에게 관직과 상을 주고 7,777명을 모집해 성을 지키도록 했다. 이 미신 같은 이야기가 북송 멸망의 전말이다.

 

북송과 남송 지도 /위키피디아
북송과 남송 지도 /위키피디아

 

금군이 변경성에 바짝 진격하자 송 조정은 곽경에게 출병하라고 재촉했다. 곽경은 마지못해 병사들을 성밖에 보내고 자신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도술을 시늉냈다. 7,777명의 병사는 제대로 접전도 하지 못하고 죽어갔고, 금나라 병사들은 성문을 열고 성내로 들어왔다. 곽경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변경성이 함락되었는데도 흠종은 금 진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하지만 금나라 장수 종한과 종망은 흠종을 폐했다. 뒤늦게 흠종은 주화파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127년 금 장수 종한과 종망은 송 흠종을 군영으로 불렀다. 흠종이 도착하자 그대로 구금되었다. 금 군대는 휘종, 흠종, 태후, 황후, 소실, 공주 등 황족 3천명을 압송해 금나라 수도로 끌고 갔다. 물론 수많은 금은 보물도 싹쓸이 하듯 긁어 가져갔다. 중국 역사에서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금은 주화파의 우두머리 장방창(張邦昌)을 황제로 않히고 국호를 초()라고 개칭한 다음 이 괴뢰정권을 통해 옛 송의 백성들을 지배하려 했다.

하지만 황족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구(趙構)11275월 남경(南京)에서 남송을 건국한다. 이로써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 시대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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