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의 흥망④…명장 악비를 죽인 간신 진회
宋의 흥망④…명장 악비를 죽인 간신 진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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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파들의 음모에 주전파들 줄줄이 처형…남송, 끝내 금나라 신하로 굴복

 

여진족 금()나라에 쫓겨 1127년 남송(南宋)을 건국한 조구(趙構)는 어쩌다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북송 8대 휘종의 9남이자 9대 흠종의 아우였지만, 궁녀 소생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여건에서는 황위를 승계할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금나라가 침공하자 흠종은 화친을 청하며 그를 볼모로 보냈지만, 금에서는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려보내고 적통 조추(趙樞)를 볼모로 데려가는 바람에 조구는 외지로 파견나가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금이 휘종, 흠종 등 황실가족 3천명을 끌고갈 때에 빠질수 있었다.

 

송의 장군 종택(宗澤)은 황실이 모두 적의 손에 넘어가자 조구를 황제로 모시고 송()나라를 재건했다. 조구가 유일한 친왕(親王)이었고 그의 휘하에 8만의 병력이 있었다.

조구는 종택의 권유로 남송 정권을 수립했으니, 송의 계보로 10, 남송으로는 초대황제인 종(高宗)이다. 조구는 휘종, 흠종에게 미움을 사 좌천되었던 항전파로 백성의 신망이 높았던 이강(李綱)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새 정권에는 이강·종택 등 일부만 항전파였고, 주화파, 즉 투항파가 대다수였다.

이강은 금나라와 항전할 것 의병들을 받아들일 것 현인들을 기용할 것 국방을 강화할 것 간신들을 몰아낼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강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휘종과 흠종의 주화 정책을 따라갔다. 주화파들은 사사건건 이강을 중상모략했다. 간신들은 이강이 황제 위에 있다고 참소하자 고종은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고종은 주화파 황잠선(黃潛善)을 재상에 앉혀 이강을 견제했다. 주화파는 이강이 황제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하자, 귀가 엷은 고종은 이강을 파직시켰다. 이강이 재상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불과 75일이었다. 드디어 새로 수립된 남송 정권은 투항파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고종은 남쪽으로 도망칠 궁리만 했다.

 

남송정권 수립의 일등공신인 종택도 항전파였다. 그는 동경유수(東京留守) 자리를 맡아 국경을 수비했다. 종택이 국경을 단단히 지키며 남송 정권이 안정되자 금나라는 사절이라는 명분으로 첩자를 파견했다. 종택은 그 자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은 종택에게 사절을 풀어주고 극진히 대접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종택은 황제의 명을 따랐다.

종택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받아들어 정규군으로 편성하고 주요 거점에 보루를 쌓고 금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종택은 고종에게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 카이펑)으로 복귀해 옛 영토를 회복하자고 여러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는 주화파의 두목 황잠선에 의해 차단되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종택은 아들을 궁궐에 보내 황제를 알현토록 했지만, 고종은 아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금이 호시탐탐 남송 정권을 노리며 군사 도발을 벌였는데, 종택은 그때마다 막아 냈다. 고종은 종택의 전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종택은 지병이 있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었다.

 

종택이 죽자 두충(杜充)이라는 주화파가 동경유수 자리를 이어받았다. 금군이 남하해도 그는 막지 않았고, 의병들을 도적떼라고 비난했다. 군과 민의 일치가 무너져 국경이 위태로워졌다. 이 틈을 노려 금군이 1129년초 장쑤성)江蘇省)을 침입해 양저우(揚州)를 공격하자 고종은 혼비백산해 앙쯔강을 건너 도주했다.

고종은 금 진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는 친필서신을 보냈다. “나는 더 이상 황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오직 대금(大金) 황제만이 천자입니다. 대금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더 이상 남쪽에는 염려하지 않으심이 옳을줄 압니다.”

금 황제는 남송 황제의 편지를 보지도 않았고, 금의 군대는 남하를 계속했다. 고종은 항저우(杭州)로 도망가고, 또다시 저장성(浙江省)으로, 나중에는 배에 올라타 해상으로 도주했다. 금나라 군대는 배에 올라타 고종을 추격했지만 폭풍우가 불어 더 이상 쫓지 않았다.

남송에도 맹장은 있었다. 금의 군대가 북으로 철수하자 남송의 장군 한세충(韓世忠), 악비(岳飛)가 추격전을 벌여 금나라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세충은 8천명의 군사로 황천탕(黃天蕩)이란 곳에서 금 장수 올출(兀朮)의 병력 10만명을 48일이나 포위했다.

 

중국 항저우에 있는 악비 상 /위키피디아
중국 항저우에 있는 악비 상 /위키피디아

 

악비는 중국 한족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금의 침략을 받게 되자 의병에 가담해 수도 변경 방어에 나섰다. 그는 기병 1백으로 금의 대군을 무찌른 신화적 존재였다. 금군은 악비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악비는 항상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병사들도 이에 고무되어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했고, 적들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쳤다고 한다. 백성들은 악비의 군대를 악가군이라 부르며 그의 군대를 믿었다.

악가군은 유광세(劉光世), 한세충(韓世忠), 장준(張俊)등 군벌과 협력해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淮河), 친링(秦嶺) 산맥에서 저지했다.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를 약화시켰는게 크게 기여했다.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넣는 그림 /위키피디아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넣는 그림 /위키피디아

 

한세충, 악비 등에 의해 남송이 비교적으로 안정되어 갈 무렵, 진회(秦檜)라는 자가 등장했다. 진회는 중국 역사에 대표적인 간신으로 꼽히는 인물로 금군이 남하하자 곧바로 금에 투항한 인물이다. 남송 정권이 안정될 기미를 보이자, 1130년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금나라에서 도망쳐 왔노라며 남송에 복귀했다. 금나라는 진회가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할 것으로 믿고 그의 남송 복귀를 허락했다는 설도 있다.

진회는 남송의 재상 범종윤(范宗尹)을 만나 고종에게 천거해달라고 청을 넣었다. 범종윤은 진회를 고종에게 천거했고, 진회는 고종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진회가 금과의 화친을 요청하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는데, 고종도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싶었기에 진회를 중용하게 되었다. 고종은 진회를 외교관계를 담당하는 예부상서로 임명하고, 금과의 화친을 추진했다.

진회는 화친의 조건으로 원래 강남 사람들은 그대로 남송에 살고 황허 이북에서 온 사람은 금나라로 되돌아 가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남송 백성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신들은 백성들을 북송(北送)하면서 화친을 도모할수 없다며 진회의 해임을 촉구했다. 고종은 어쩔수 없이 진회를 해임했다.

하지만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휴전 협상이 급진전하면서 고종은 진회를 재상으로 다시 불렀다. 화친의 조건은 국경을 어디로 할 것인지와 금과 남송의 지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남송 내부가 항전파와 화친파 둘로 분열되었다. 진회가 화친파의 우두머리였고, 악비가 항전파의 대표 격으로 부상했다. 그때 금 희종(熙宗)이 사절을 남송에 보냈다. 칙사 소철(蕭哲)은 송의 황제는 금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 사절단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항전파들이 분노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화친이 지연되었다.

이때 악비는 상소문을 올려 금나라를 믿을수 없다. 화친을 하면 금의 종이 된다면서 무력으로 금에 빼앗긴 땅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악비는 진회에게도 재상이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였으므로 후세인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오라고 질책했다. 진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반격의 기회를 찾았다.

그 무렵 고종의 아버지 휘종이 금나라에서 사망했다. 금은 화친이 성사된 후에 휘종의 시신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주화파들은 태상황의 영구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화친을 다시 꺼내 들었다. 고종도 부황을 편안하게 모셔야 한다며 화친을 지지했다.

11391월 고종을 대신해 재상 진회가 무릎을 꿇고 금나라 칙서를 받드는 형식으로 화친조건이 받아들여졌다. 남송은 금나라의 신하로 칭해야 하며, 매년 백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을 금나라에 공물로 바친다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으로 남송은 휘종과 황후의 시체를 돌려받았다. 이때의 화친을 역사에서 소흥화의(紹興和議)라고 한다.

 

소흥화의 1년후인 11405월 금은 약속을 깨고 올출을 앞세워 남침을 재개했다. 악비의 예언이 적중했다. 금군은 한달도 안 되어 중원과 섬서지역을 점령하고 화이허 이남으로 밀려들었다. 금군의 남하를 막아선 남송의 장군은 악비였다.

그해 78일 악비와 올출은 결전을 벌였다. 금군의 철기병은 악비의 쇠갈고리 부대에 무너졌다. 금군은 수만명을 잃고 도망쳤고, 악비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올출은 일주일 후에 다시 12만 군대를 모아 공격을 재개했다. 악비의 기병대는 적진을 종횡무진하며 금군을 무찔렀고, 을출은 도리 없이 철수를 명했다. 이 전투 이후 산은 흔들 수 있어도 악비군은 흔들 수 없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패퇴해 돌아간 올출은 진회에게 밀서를 보냈다. “당신이 진정으로 화친을 원한다면 악비를 죽여주시오.” 악비에게 악감정이 있었던 진회는 화친을 위해 악비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진회는 악비와 원수지간인 사간 묵기설(墨其泄, 혹은 万俟卨)에게 악비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쓰게 했다. 또 진회는 수하의 간신들에게 악비를 모함하게 했다. 고종도 악비를 못마땅해 하던 터라 상소를 받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벼슬을 그만두게 했다.

진회의 마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악비에게 불평하던 부하 장준(張俊)을 매수해 악비를 고발하게 했다. 악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심문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끝까지 거짓을 진술하지 않았다. 진회도 더 이상 악비의 죄를 찾을수 없었다. 악비의 아들도 잡아 고문이 가해졌다.

겨울이 다가왔다. 악비 부자는 찬바람이 부는 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솜옷과 이부자리, 목을 것을 갖고 감옥을 찾아와 악비를 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민중반란 조짐이 보이자 진회는 부인 왕씨의 조언을 듣고 감옥 간수에게 악비 부자를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다. 1141127일 악비는 살해되었다. 나이 39세였다.

 

악비의 무덤 /위키피디아
악비의 무덤 /위키피디아

 

전우 악비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세충이 달려와 진회에게 따졌지만, 핀잔만 들었다. 한세충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서호에서 은둔하다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악비가 죽은지 9년 되던해 진회가 조회에 나가고 있을 때 한 하급군인이 달려들어 칼로 찍었다. 진회는 간신히 피했으나 중태에 빠졌다. 진회는 온갖 약을 다 썼지만 끝내 1155년 악비의 곁으로 갔다.

진회가 죽은후 고종은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었다. 명나라 때 어떤 이가 진회와 부인 왕씨, 묵기설, 장준 네 역적이 꿇어 않은 철상을 만들어 악비 묘 앞에 놓고 죄를 빌게 했다.

 

간신 진회와 부인 왕씨가 무릎 꿇고 악비에 사죄하는 상 /위키피디아
간신 진회와 부인 왕씨가 무릎 꿇고 악비에 사죄하는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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