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음모론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음모론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4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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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을 바탕으로 사실 왜곡…국가부도 나면 생활용품 사지 못하고 생산기반 흔들려

 

주말에 김혜수·유아인 주연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한 케이블 채널에 방영되었다. 1년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주변에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영화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그 핵심이었다. 개봉 때엔 시간에 쫓겨 보지 못했는데, 어느 TV 채널에서 방영하길래 그 내용이 궁금해 뒤늦게나마 시청했다.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엉터리 영화였다는 것이다. 20여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왜 제작자들은 허구적 논리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이 영화가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영화는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음모론에 착안했다. 영화제작사도 프로그램 안내글에 외환 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되었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한 줄의 기사에서 시작된 영화이며,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였다고 인정했다.

 

허구의 출발은 미국의 개입이다. 미국 재무부 차관이 IMF 협상단에 끼어들어 한국의 은행들을 파산시키고 고금리를 적용해 기업을 파산시키고, 노동 유연성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멀쩡한 대한민국을 미국이 경제적 속국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이 골자다.

영화 포스터 /네이버 영화
영화 포스터 /네이버 영화

 

미국의 개입을 허구의 출발점으로 하면서 논리 전개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이라는 열혈 애국지사가 등장하고, 그녀는 미국을 대변한 IMF에 저항해 국가부도를 주장한다. 멋져 보인다. 강대국에 맞선 독립투사와 같다. 재정경제원 사람들을 미국의 앞잡이로 만들었다. 그들은 가지 않아도 될 IMF에 간 반역자들로 묘사된다.

또 김혜수의 오빠인 허준호(갑수)는 중소기업을 하다가 갑작스런 IMF 조건 이행으로 사업에 실패한다. 동료사업가는 자살을 한다. 미국의 음모로 멀쩡하던 기업이 쓰러진 것으로 그려진다. 종금사들을 파산시키라는 IMF의 요구에 한혜수는 저항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그런 금융회사가 살아날 것처럼 스토리는 이어진다.

이런 와중에 유아인(윤정학)은 경제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거부가 된다. 영화는 돈을 번 자들을 미워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영화 제작자들은 몇가지 팩트를 자기마음대로 엮어 자기들의 논리를 전개했다. 자신들이 짜놓은 논리틀에 맞지 않으면 허구적 사실을 동원했다. 그리고 적을 만들었다. 미국, 그리고 가진자들은 나쁜 세력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쓰러져간 영세기업가, 노동자는 피해자이고, 한혜수는 그들의 대변자가 된다. 20년전의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질 즈음에 사실을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이념을 구성한 게 바로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1997년말 미국의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은 한국 정부가 부도나길 기다렸다. 잘난척 하는 한국 정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길 기다렸다. 아시아 국가중 하나쯤은 부도가 나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 영화에서 기준일로 삼은 그해 11, 루빈은 휴가를 얻어 미국 동부해안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한국을 돕자고 한 미국 내 기관은 국무부와 펜타곤이었다. 한국경제가 부도나 망해 버리면 북한이 쳐내려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펜타곤이 앞장서 국무부를 설득했고, 국무부는 재무부를 설득했다. 미국의 국가결정에 펜타곤의 영향력은 결정적이다.

루빈은 하는수 없이 워싱턴으로 돌아가 한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약속한다.

이 영화가 사실과 다른 점은 한국정부가 IMF와 구제금융협상을 벌이던 11월에 미국 재무부는 오히려 한국을 부도내자고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김혜수가 바라던 것처럼. IMF 지원이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12월에 한국 경제는 바닥 모르게 추락했고, 그 막바지에 1224일 빌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지하벙커 회의에서 한국을 구제하기로 결정하며 한국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그후 이듬해 초 루빈은 미국과 유럽 은행들을 불러 한국에 빌려준 단기자금을 만기가 긴 외채로 전환하도록 외채협상을 주선하고, 이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한국은 위기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영화 제작자들의 핵심 논리는 김혜수가 국가부도를 주장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어처구니가 없다. 마치 IMF에 저항하기 위해 내 배를 스스로 째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 국가부도는 채무유예선언(모라토리엄)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산업은 정지하고 국민들은 굶주림에 빠지게 된다. 식량자급률 30%도 되지 않는 나라가 무슨 돈이 있어 남의 나라에서 식량을 구입하며, 전량 수입하는 포스코의 원자재는 어디서 들여온단 말인가. 우리 수출이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해서 파는 구조인데, 수출이 끊기면 어디서 돈을 버나. 일단 급하게 돈을 구해 부도를 막아야 한다. 그게 가정이나, 기업이나, 나라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식량을 자급하고 석유 부존자원도 풍부한 나라였기에 버텼다. 석탄산업도 폐광한 상태에서 한국경제가 부도나면 어디서 기름을 사오고 에너지를 구입하나. 1980년대 북한에 가뭄과 홍수로 수십만명이 굶어죽는 사태는 왜 빚어졌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기나 했나. IMF를 가지 않고 국가부도를 냈더라면 대한민국은 더 비굴하게 일본에 손 벌리고 미국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허구적 논리를 주제로 삼은 것은 우리 영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강한 이념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한국영화계의 현실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미국 영화 <빅쇼트>(Big Short)와 비교하기도 했는데, 빅쇼트는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 빅쇼트는 2006~2007년 미국에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복잡한 수리경제학으로 진실을 왜곡한 뱅커와 사실을 찾아내려는 주인공들의 피나는 금융싸움을 그렸다. 주인공들도 실재했다.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주인공인 듯 싶은 사람들을 제작자들이 자의로 왜곡하고 창작했다. 사실을 왜곡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영화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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