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금융파워⑫…1998 월가의 일본경제 공습
미 금융파워⑫…1998 월가의 일본경제 공습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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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이치 파산…일본 대장성, 미국 요구 받아들여 1천억불 공자금 조성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 진행될 때의 일이다. 미국은 일본 경제를 맹비난했다. 아시아 위기에 일본이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을 요구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인데, 그때의 일을 정리한다.

 

19971121. 동경 금융시장에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동경 상공에 나타난 비행기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의 심판관을 자처하는 무디스(Moody's)였다. 타깃은 일본 4위 증권사인 야마이치 증권.

뉴욕 기지에서 날아온 공격자 무디스는 이날 야마이치를 맹폭격했다. 공격 무기는 핵무기가 아니라, 신용평가라는 신무기였다. 2의 금융대국을 자랑하며 대동아 공영권을 외치며 아시아의 엔화 기축통화론을 펼치던 일본은 무디스의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무디스는 오전에 야마이치 증권의 신용등급을 ‘Baa3’에서 ‘Ba3’으로 3등급 떨어뜨린데 이어 몇시간만에 또다시 ‘Caa1’로 떨어뜨렸다. 2차대전후 미군 점령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 굴지의 증권사로서의 명맥을 유지해온 100여년 역사의 야마이치는 일방적인 무디스의 공격을 받았다. 무디스의 공격으로 야마이치의 신용등급은 국제사회에서 쓰레기로 취급하는 정크본드(Junk Bond)’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3일후 야마이치는 대장성에 자진폐업 신청을 냈다. 국내외 금융기관, 투자자들이 야마이치에 대한 신용거래를 끊었기 때문이다. 야마이치로서는 다른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국제신용평가회사가 내리는 평가는 국제금융사회에서 재판관의 판결과 같은 절대적 효력을 갖는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선두를 경쟁하는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tandard and Poor's)는 모두 뉴욕 월가를 본거지로 하며, 미국 금융시장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각국 금융기관과 기업의 점수를 매긴다. 두 회사의 평가는 투자자들의 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금융기관들은 신용평가를 기준으로 채권과 중권 보유 및 매매를 결정한다. 신용 등급이 낮은 국가나 기업은 금융시장에서 증권과 채권을 발행하기 어렵다. 신용등급이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질 경우 금융시장에서 투자자를 모으기 어렵다. 정크본드로 발행되는 채권은 부도(default)가 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높은 금리로 발행해야 하고, 투자자들을 모으기 힘들다. 미국의 일반 투자회사나 펀드들은 정크본드를 사지 말라는 내규를 정해놓고 있다.

하루 아침에 쓰레기 취급을 당한 야마이치는 국제시장은 커녕 일본 시장에서도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구할 수 없게 됐다. 갈 길은 파산밖에 없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은 그 동안 뉴욕 월가가 주도하는 국제신용평가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시피 했다. 월가의 무디스와 S&P가 일본 금융기관을 맹폭할 때 많은 일본인들은 정크본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정부가 어련히 도와줄 것인데, 왜 미국 회사가 이래저래 남의 나라 회사에 간섭하느냐는 반감으로 가득 찼다.

사실 그 동안 일본 금융기관들은 국제 신용평가기관의 채점에 신경을 끄고 살아도 될 여건이었다. 설사 파산 위기에 처하더라도 정부가 구제자금을 주었고, 자이바쓰(財閥)를 구성하고 있는 계열사들이 빚을 덜어주거나 연대보증을 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살아날 구멍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기업 도산이 증가하면서 문제는 심각해졌다. 전후 일본 경제를 이끌어온 대장성도 은행 파산에 더 이상 구제금융이 없다고 선언했고, 기다린 듯 야마이치의 파산신청을 접수해버렸다.

무디스가 야마이치의 신용등급을 쓰레기 취급하던 날 무디스 동경지사에 성난 일본인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 중에는 정크본드가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야마이치에 투자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의성 질문도 많았다.

일본에 월가 신용평가기관의 위력이 이처럼 영향력이 컸던 적은 없었다. 일본인들도 서서히 국제 금융사회, 정확히 말하면 뉴욕 월가가 주도하는 국제금융시장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마이치가 공격당한 후 4일 후인 1125일 이번엔 야스다 신탁이 타깃이 됐다. 이번 공격자는 S&P였다. S&P는 야마이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야스다에도 정크본드 판정을 때렸다. 야스다 주가는 이날 무려 27% 폭락했다. 야스다는 어려운 경쟁여건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건실하다S&P의 판정에 거칠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97년 11월 24일 나자와 쇼헤이 야마이치증권 사장이 기자회견에서 회사 파산을 선언하며 울먹이고 있다. /니케이 캡쳐
1997년 11월 24일 나자와 쇼헤이 야마이치증권 사장이 기자회견에서 회사 파산을 선언하며 울먹이고 있다. /니케이 캡쳐

 

1998년 새해벽두부터 워싱턴은 일본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로버트 루빈 재무 장관이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은 야전사령관을 맡았다. 그들은 일본 때문에 아시아 경제가 무너졌고, 세계 경제가 위태롭다면서, 일본 스스로의 개혁을 요구했다. 미국 재무부는 일본 대장성을 가르켜 세계 경제를 파괴하는 기관이라고 혹평했다.

미국은 일본을 무차별 공격했다. 일본이 소비진작책을 쓰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인 복합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중앙은행이 엔화를 찍어내서라도 소비를 촉진하라고 요구했다. 또 세금을 깎아주고, 1천억 달러 이상의 공적 자금을 투입, 부실 은행을 구제하라고 주장했다. 태국이나 한국 같은 조그마한 나라는 IMF 자금을 주며 경제 틀을 바꾸라고 요구했지만, 일본은 경제 규모가 커서 IMF라는 기구도 소용이 없고, 일본 스스로 알아서 할수밖에 없다는 것. 미국은 공공연히 일본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 국제사회에 여론을 만들어갔다. 미국은 일본 경제의 치유책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이 만든 처방을 쓰라고 강요했다.

일본 대장성(나중에 재무부로 명칭을 바꿨음)은 반발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아시아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아시아 위기의 구제금융 자금은 일본이 다 내다시피 했다. 아시아 위기 해결과정에서 일본은 430억 달러를 지원한 반면 미국은 고작 120억 달러를 냈고, 유럽은 70억 달러를 제공했다. 그러고도 생색은 미국이 낸다는 게 대장성 관리들의 볼멘 소리였다.

 

위기 경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19976월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아시아 위기의 가능성과 심각성을 의제에 올리려고 했으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그 문제를 입도 꺼내지 못하게 막았다. 덴버 회의 이후 한달만에 태국 바트화가 절하되고 아시아 위기가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일본 정부는 아시아 위기의 조기 진화를 위해 아시아 국가가 중심이 되어 1,000억 달러 상당의 아시아 통화기금(AMF)를 조성할 것을 제의했으나, 미국 재무부는 세계 경제의 헤게모니를 일본에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며 일본의 제안을 묵살했다. 일본 관리들은 정작 미국은 98년 말까지 의회의 반대로 IMF 분담금을 조성하지 못해 위기가 확산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1998년 상반기에 세계 경제에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 엔화 하락이었다. 엔화가 하락하면 중국 정부도 위안화를 절하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등 주변국의 통화가치가 일제히 하락, 아시아 위기는 확산될 것으로 우려됐다.

미스터 엔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사카키바라 차관은 엔화 하락을 저지하려고 노력했으나, 국제 외환시장의 딜러들은 미국의 루빈 장관의 입만 처다보았다. 루빈은 입만 열면 일본을 씹어댔다.

일본이 내수 진작책을 쓰지 않기 때문에 엔화가 떨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이 개입해보아야 소용이 없다. 나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달러 강세 정책을 고수한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1달러당 150엔에 이르면 중국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위안화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루머가 확산됐다. 워싱턴의 재무부는 북경의 정보소식통을 통해 루머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19986월 중순, 엔화는 달러당 147엔까지 폭락했다. 일부 극단적인 외환 전문가들은 연말까지 엔이 달러에 대해 200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엔화 둑이 무너지면, 중국 위안화가 무너지고, 곧바로 홍콩 달러, 한국 원, 태국 바트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순간 루빈은 마지막 베팅을 했다. 클린턴은 일본과 공조, 외환시장에 개입하자고 했지만, 루빈은 나서지 말라고 말렸다. 일본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더 골탕을 먹여야 한다는 게 루빈의 속마음이었다.

미국 동부시간으로 617일 밤 1130, 일본의 오부치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엔화 하락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시장에 공동개입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동안 일본이 엄청난 군자금(외환보유고)을 풀어 추락하는 엔화를 붙잡아 매려고 노력했으나 외환 투기꾼들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클린턴은 오부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루빈은 마지못해 대통령의 뜻을 따랐지만, 일본이 내수진작책과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정리등의 금융개혁을 전제로 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일본측에 요구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1998920일 일본 재무부는 1천억 달러의 공적 자금 조성 대장성의 권한 이양, 금융 기관에 대한 규제강화등 내수진작책을 발표했다. 다음날 뉴욕에서 있을 미-일 정상회담을 위해 마련한 발표였다. 오부치 내각은 반대하는 야당을 며칠동안 밤을 세워가며 설득, 마침내 합의를 끌어냈다. 미국을 위해 할만큼 했다는 자신이 섰다.

그러나 오부치와 정상회담을 마친 클린턴 대통령은 만족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야당과의 잠정 합의가 아니라 의회를 완전히 통과시키라고 요구했다.

그해말 일본 의회는 오부치 내각의 요구가 아니라, 미국의 요구에 쫓겨 개혁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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