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의 비밀⑥…미국 진출의 오판과 실패
로스차일드의 비밀⑥…미국 진출의 오판과 실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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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편견서 벗어나지 못해…벨몬트가 개척했으나 남북전쟁에 판단 실패

 

로스차일드의 창업자 마이어 암셸은 가업을 남자 후손에게 물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딸들에겐 지참금을 두둑히 주어 시집보내되, 사업에 일체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위도 회사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였다. 마이어 암셸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맡아들에겐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지키고, 둘째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에, 셋째 나탄은 영국 런던, 넷째 카를은 이탈리아 나폴리, 다섯째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로스차일드 은행을 열었다.

마이어 암셸이 죽은후 그의 후손들은 장자승계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본가의 사업을 이어받은 장남 암셸 마이어에겐 자식이 없었다. 암셸은 말년에 신경질적이 되고, 철저히 유대교에 파묻혀 지냈다. 암셸이 죽은후 후계자가 비게 되었다. 이 문제는 나폴리에 가 있던 넷째 카를 마이어가 낳은 두 아들을 프랑크푸르트로 데려오면서 해결되었다. 카를에겐 카를(同名), 아돌프, 빌헬름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이중 카를과 빌헬름이 큰아버지가 하던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이어받았고, 둘째 아돌프가 아버지 카를이 죽은 후 나폴리 사업을 물려받았다.

 

로스차일드 오형제의 유럽 사업 가운데 이탈리아 사업이 가장 지지부진했다. 카를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업무 추진력이 약했고, 형제들의 자금력에 의존해 나폴리 사업을 벌였다. 카를과 그의 아들 아돌프는 다른 나라의 형제나 조카들에 비해 정치적 변동기에 살아남는 결단력과 직감이 부족했다.

이탈리아 로스차일드는 주고객인 나폴리 왕가에 붙어 영업을 했다. 나폴리왕국은 1860년 카부르와 가리발디와 같은 이탈리아 통일 세력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아돌프에게도 자식이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폴리 왕실이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버리자 아돌프도 프랑스로 떠나버렸고, 이탈리아 로스차일드는 오형제중 가장 먼저 문을 닫았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떠맡은 카를과 빌헬름은 딸만 낳았다. 카를은 7, 빌헬름은 3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영국의 친척들에게서 상속자를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프루트의 정치 상황이 달라졌다. 북부 프로이센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1855년 프랑크푸르트는 자유시로서의 지위를 발탈당했고, 독일의 금융중심지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베를린은 반유대사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처음에 로스차일드의 지원을 받고자 카를과 빌헬름에게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조카들이 이어받은 프랑크푸르트의 금융사업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1886년 카를이 숨을 거두고, 1901년 빌헬름도 죽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더 이상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영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청산절차를 밟았다. 만일 이때 프랑크푸르트 사업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30년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등장했을 때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했을 것이다.

이로써 프랑크푸르트와 나폴리의 로스차일드는 문을 닫게 되었다. 로스차일드의 유럽 영토는 19세기를 거치면서 5개국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3개국으로 좁혀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 건물 (1855년)/위키피디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 건물 (1855년)/위키피디아

 

19세기의 특징 중 하나는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뉴욕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미국은 잠재력이 큰 나라였다.

로스차일드의 실책 중 하나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유럽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줄 알았고, 미국은 뜨내기들이 활개치는 3류 시장 쯤으로 판단했다.

그러면 로스차일드가 당시 미국시장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들여다 보자.

 

로스차일드도 19세기의 변화를 직시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의 불길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로 건너갔고,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신대륙도 활기를 띠었다. 북미 대륙의 신생 미국은 남부에서 면화, 캘리포니아에서 금, 중부 평원에서 밀을 생산해 유럽에 식량과 원자재를 공급하며 급성장했고, 동부 해안지대에 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도 금이 발견되고, 남아프리카에 다이어몬드가 터져 나왔다. 아시아의 미개국이었던 일본의 지도층도 뒤늦게 산업화를 공부하러 유럽을 방문했다.

로스차일드도 일찍부터 해외에 진출했다. 중앙아메리카에 제철소, 북미대륙에 운하회사를 소유하거나 대주주가 되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의 해외진출에는 결정적 흠이 있었다. 핏줄 중심, 가문 위주의 경영이 더 큰 세계를 보는데 눈을 가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2, 3대로 내려가면서 유럽의 풍요로운 생활에 젖어 버렸다. 돈이 있으니 각국 군주들이 찾아오고 시인이며 음악가들이 항시 그들과 만나려 했다. 대저택에 살고 저녁에 무도회에서 춤을 추며 귀족들과 사귀는 일상 속에서 로스차일드는 초기의 진취력을 잃어 버렸다. 가문 중에 누구 하나 유럽을 떠나 신세계로 가려 하지 않았다.

일가는 해외에 많은 지사를 설립했지만 책임자는 충직한 직원들을 선별해 맡겼다. 또는 현지의 상인에게 대리점 영업을 위탁, 운영했다. 당시만 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던 때라 미국을 오가거나 연락을 주고받는데 몇주일이 걸렸다. 따라서 대리점 책임자에게는 상당한 자율권이 주어졌다.

해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 미국의 뉴욕이었다. 로스차일드는 일찍부터 뉴욕에 J.L.&S,I. 조지프라는 대리점을 두었다.

 

아우구스트 쇤베르크(August Schönberg)라는 15살의 독일 유대인 소년이 1829년 프랑크푸르트로 와서 로스차일드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똑똑하고 말 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부와 명예에 대한 욕구도 강했다. 소년은 적극적이었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처리했다.

암셸과 카를은 1832년 이 소년을 나폴리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복잡한 국제금융구조를 습득하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1937년 스페인령 쿠바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스차일드 사업이 위기에 빠졌다. 암셸과 카를 형제는 누구를 보낼까 망설이다 23살 된 청년을 보내기로 했다. 쇤베르크를 실은 배는 카리브해를 가기 전에 미국 뉴욕항에 들렀다. 쇤베르크는 뉴욕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그에게 신대륙의 도시가 너무나 화려했고, 엄청나게 발전할 가능성을 직감했다. 그의 판단력과 돌파력은 런던과 파리 로스차일드를 일군 나탄(네이선)과 제임스를 닮았다. 그는 지저분하고 혼란한 스페인의 식민도시로 가기보다는 뉴욕에 눌러 않기로 했다.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미국은 금융공황을 맞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미국에 과잉투자하는 바람에 생겨났던 거품 경제가 터졌고, 고객들이 은행에 줄을 서 돈을 찾아가는 현상이 빚어졌다. 그 바람에 로스차일드 뉴욕 대리점이었던 J.L.&S,I. 조지프도 고객들의 상환 요구를 버티지 못해 쇤베르크가 도착하기 두달 전에 파산했다.

 

쇤베르크는 이제 쿠바로 가지 않고 뉴욕에 눌러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본사에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름을 오거스트 벨몬트(August Belmont)로 개명하고, 종교도 바꾸었다.

그는 가지고 갔던 로스차일드 자금으로 파산한 대리점의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개명한 자신의 이름을 따 오거스트 벨몬트(August Belmont & Company)사를 세웠다. 그리고 유럽의 금융제국 로스차일드의 이름을 내걸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우선 도산한 J.L.&S,I. 조지프의 채권과 채무를 정리했다. 그는 옛 고객들에게 편지를 보내 재산확인을 요청했다. 채무는 갚고 채권은 회수했다. 그리고 나서 유럽 본사에 사실을 보고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파리의 로스차일드들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수 없었다. 금융위기에 사람을 바꿀수 없었다. 위기엔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하고, 쇤베르크, 아니 벨몬트가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있음을 로스차일드는 알고 있었다.

벨몬트는 유럽에서 올 때 가져온 로스차일드 자금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영국 로스차일드를 설립한 나탄이 선제후 빌헬름 백작의 자금으로 개인 돈을 챙긴 수법을 벨몬트는 그대로 답습했다.

유럽의 로스차일드는 어쩔수 없이 벨몬트에게 대리점 일을 맡기긴 했지만,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국의 라이어닐은 뛰어난 직원을 뉴욕에 파견해 벨몬트를 감시하도록 했다. 파견된 직원은 벨몬트가 파산한 회사를 살려 영업을 잘하고 있다는 보고를 보내왔다. 프랑스의 제임스도 파리의 전문가를 뉴욕에 보내 크로스체크했다. 양쪽의 호의적인 보고에도 불구하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벨몬트를 믿지 못했다.

 

오거스트 벨몬트 /위키피디아
오거스트 벨몬트 /위키피디아

 

벨몬트는 미국에서 펄펄 날았다. 로스차일드의 나탄, 제임스를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은 신흥도시였다.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이나 버지니아의 찰스턴처럼 고리타분한 종교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누구나 능력 있으면 돈을 벌고 부와 명예를 얻는 도시였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없었다.

벨몬트는 로스차일드가가 유럽에서 하는 일을 답습했다. 화려한 만찬회를 열어 최고급 프랑스 와인으로 명사들을 접대했다. 맨해튼에 호화 저택을 사들여 파티를 하고 저명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고급 마차를 타고 다녔고 경주마들을 소유했다. 어느덧 그는 뉴욕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미혼인 벨몬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한 여성이 그를 좋아 했는데, 그녀를 따라다니던 남성이 결투를 신청했다. 벨몬트도 총을 쏠줄 몰랐지만 그 남성도 총에는 문외한이었다. 둘은 권총을 들고 서로를 쏘았지만 총알은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결투에서 살아남은 벨몬트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벨몬트는 미국 국채를 샀다. 미국은 당시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로스차일드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었다. 국채 이외에도 금괴, 면화, 담배, 철도, () 은행채, 공장 등 다방면에 투자를 해 돈도 벌고 정보도 얻었다.

벨몬트는 국공채 매입으로 미국 정부에서 중요한 인물로 대우받았다. 그는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인들과 인맥을 만들었다.

 

1848년 프랑스엔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파리의 제임스는 맏아들 알퐁스를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미국에 보내면서 벨몬트를 감시하게 했다. 유럽 로스차일드는 벨몬트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여겨온 터라, 알퐁스가 미국에 건너가 확실한 물증을 얻어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알퐁스는 6개월 체류하면서 미국의 발전상에 반하고 벨몬트에게 설득당했다. 미국은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였고, 캘리포니아는 거대한 가능성을 보였다. 언젠가 중국과의 교역에 유럽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벨몬트는 알퐁스에게 뉴욕에 대리점보다는 로스차일드 직영 은행을 설립하라고도 권했다.

알퐁스는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자신이 로스차일드 뉴욕은행을 만들어야겠다고 벨몬트에게 말했다. 알퐁스의 생각이 굳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귀국 지시를 받았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 미국 사업에 대해 긍정적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제임스와 영국의 라이어닐은 알퐁스의 주장을 무시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알퐁스가 프랑스로 돌아간 직후에 벨몬트는 캐럴라인 페리(Caroline Perry)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은 훗날 네척의 배로 일본을 개항시킨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었다. 명문가와 결혼한 이 사나이는 그후 10년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연방과 노예제 유지를 주장하는 남부와의 전쟁이 임박했다.

이때 벨몬트는 북부 연방을 지지했고, 유럽 본사에 북부를 지원하라고 보고했다. 파리의 제임스는 이번에 셋째 아들 살로몽을 미국에 파견했다. 살로몽은 북부와 남부를 둘러보고 남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올렸다. 델몬트는 살로몽의 보고에 놀라면서도 실망했다.

로스차일드 유럽 본사는 델몬트와 살로몽의 보고서를 종합 판단해 북부와 남부 사이에 중립을 지키킨다는 애매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남북전쟁(1961~1865)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로스차일드의 판단은 실패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 연방은 북부를 지원한 은행가들을 적극 지원하고 중립을 지키거나 남부를 지원한 은행들을 배제했다. 벨몬트의 대리점도 사양길로 들어섰다. 내전에서 북부를 지원한 유대계 J&W 셀리그먼(J&W Seligman) 사가 미국의 유력한 은행으로 부상했다.

늘그막에 제임스는 미국은 어떤 계산도 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고 후회했지만, 한번 놓친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로스차일드는 그후에도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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