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의 비밀⑦…비스마르크를 비웃다
로스차일드의 비밀⑦…비스마르크를 비웃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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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 전쟁 발발에 반대…전후 프랑스 배상금 2년만에 상환하는데 결정적 기여

 

로스차일드 창업자 오형제 중 막내 제임스가 186811월에 마지막으로 죽자, 이제 3세대가 런던과 파리, 빈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때는 바야흐로 프로이센 왕 벨헬름 1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사이에 감정이 격화하고 두 나라에 전운이 짙어가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치며 독일을 통일했다. 프로이센은 사사건건 프랑스에 시비를 걸었다.

불씨는 스페인에서 떨어졌다. 1868년 스페인에 혁명이 일어나 이사벨라 2세 여왕(Queen Isabella II)이 퇴위화고 왕좌가 비었다. 스페인은 비밀리에 프로이센의 호엔쫄레른(Hohenzollern)가에 왕위를 제의하며 레오폴드(Leopold)를 초대했다. 레오폴드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재상의 재촉을 받아 1870619일 스페인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 비밀거래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가 분노했다. 호엔쫄레른가가 스페인 왕이 되면 프랑스는 동으로 프로이센, 서로 스페인에 포위된다.

75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로스차일드를 이끄는 알퐁스를 급히 불렀다. 황제는 몹시 불안하면서 런던의 로스차일드 사촌들에게 연락해 영국 정부가 프로이센의 침략야욕을 저지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알퐁스는 암호 전보를 런던에 보냈다.

런던 로스차일드의 라이어닐은 알퐁스의 전보를 받고 급히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총리에게 달려갔다. 여왕을 접견하러 가던 중에 로스차일드를 만난 총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영국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글래드스턴은 해외식민지도 줄이고 전쟁을 가급적 피하자는 불개입주의자였다.

라이어닐은 화가 났다. 영국의 전쟁 회피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라이어닐은 야당 총재인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를 찾아가 총리를 비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로스차일드 일가는 글래드스톤과는 거리를 두고 디즈레일리와 가까워지게 된다.

로스차일드는 왕위계승 싸움을 촉발한 스페인에게 항의하고 베를린에도 불만을 쏟아 부었다. 며칠후 베를린에서 레오폴드가 스페인 왕위를 단념한다는 답변이 왔다. 일단 독일이 굴복한 것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도발을 기다렸다. 714일 나폴레옹 3세는 군 동원령을 내리고 19일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고 포문을 열었다. 비스마르크는 충분한 명분을 갖고 군대를 서부전선으로 몰아 파리로 진군시켰다.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분노했다. 그토록 전쟁을 반대했는데 프랑스가 먼저 걸어 비스마르크의 야욕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알퐁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전쟁에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을 런던 친척들에게 피난보내고 부상자를 돌보는데 비용을 조금 냈을 뿐이었다.

개전 한달이 좀 지나 파리가 포위되고, 91일 프랑스군은 세당 전투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다.

 

1870년 9월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Wilhelm Camphausen 그림) /위키피디아
1870년 9월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Wilhelm Camphausen 그림) /위키피디아

 

파리에서는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신정부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 저택(Château de Ferrières)에 최고사령부를 설치했다.

빌헬름 1세가 르네상스풍의 저택을 둘러보고 감탄을 했다. 좋은 혈통의 말들이 우글거리고 온실에서 향기로운 꽃이 만발해 있었다. 빌헬름 1세는 광장과 공원을 둘러보면서 유럽의 군주들이 어떻게 이런 궁전을 감당할수 있겠나. 오직 로스차일드만이 가질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호전적이었지만 예의범절을 지키는 군주였다. 프로이센 왕은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건물을 파손하거나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엄명을 내렸다. 프로이센 군주는 알퐁스 남작의 화려한 침실을 쓰지 않고 대신에 알퐁스의 부인 레오노라의 방에 잤다. 그러면서도 침대에는 사용하지 않고 전시용 침대를 가져다 썼다. 프로이센 왕은 페리에르를 떠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저택 숲에서 사냥을 금지하고 미술품과 소장물품에 손을 대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프랑스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독일 군대는 로스차일드 저택의 물건에 욕심이 생겼다. 비스마르크도 마찬가지였다.

비스마르크는 로스차일드 집사 베르그망에게 와인 창고에서 와인을 꺼내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늙은 집사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비스마르크는 화가 나서 값을 쳐 줄 터이니 와인 한 상자를 팔라고 요구했다. 집사는 독일 병정들의 위협에 두려워 와인을 꺼내주며 그 사실을 주인 알퐁스에게 전하고 기록으로도 남겨두었다.

집사 베르그망은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와인을 65병이나 마셔대고, 그래도 부족한 듯 했습니다. …… 병사들은 연못에서 낚시를 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더 많은 고기를 낚으려고 수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연못에 물이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낙담한 병사들은 나를 추궁하며 장군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 페리에르 몇군데에서 약탈이 있었습니다. 와인 창고가 비고 담요와 매트리스도 가져갔습니다. …… 프로이센 군은 숲의 동물을 죽이고 자기네 것인 듯 활개치고 다녔습니다.”

 

다른 곳에 도피해 있던 알퐁스는 집사의 보고를 받고 미소를 지었다. 독일 촌놈들이 로스차일드의 화려한 궁전에 휘둥그레지며 탐욕을 부리는 모습이 그에게 쾌감을 주었다. 알퐁스는 친구들에게 비스마르크 부하들의 행태를 자랑삼아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은 한 친구가 친지에게 보낸 편지가 비스마르크의 손에 들어갔다. 편지에는 프로이센 사람들은 꿩을 좋아하나 봅니다. 그들은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에서 잡은 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집사를 때리고 위협했다고 하는 군요.”라고 쓰여 있었다. ‘철의 재상이라 불리던 비스마르크는 이 편지를 보고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황제의 지시를 어긴 사실이 만천하의 웃음거리로 떠돌아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 저택 /위키피디아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페리에르 저택 /위키피디아

 

11월초가 되면서 프로이센 군에 포위된 파리에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식량이 배급되었지만 매점매석과 암거래가 활개를 쳤다. 굶주림과 물가고는 파리 시민들을 지치게 했다. 지방에선 구원부대가 오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이듬해 1월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프랑스에 황제가 없어졌으니, 자신이 유럽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정은 더 이상 전쟁을 끌고 나갈 기력이 없었고, 독일에 협상을 제의했다. 18712월 프랑스 제3 공화정의 티에르(Adolphe Thiers) 대통령과 비스마르크가 베르사이유에서 만났다. 비스마르크는 갑의 위치에 있었다.

프로이센은 국경 지역인 알사스-로렌을 양도하고 60억 프랑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배상금을 모두 받기 이전에 독일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가혹한 조건이었다.

다음달인 3, 비스마르크는 알퐁스 로스차일드를 불렀다. 키가 작은 이 유대인은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프로이센인을 만났다. 비스마르크는 로스차일드의 뿌리가 독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자신이 프랑크푸르트의 암셸 마이어와 친분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알퐁스는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조건이 무리이며, 내가 없으면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고 되받았다.

알퐁스는 비록 패전국이지만 프랑스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협상은 더 진행되어 배상금이 50억 프랑으로 낮춰졌다. 비스마르크는 배상금을 조금 깎아줘도 프랑스가 그 돈을 갚지 못할 것으로 믿었다.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군대를 오래 주둔시키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알퐁스 로스차일드는 비스마르크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입증시켰다. 그는 개전 초기에 나폴레옹 3세에겐 등을 졌지만, 공화국이 평화를 원하므로 지지를 보냈다.

알퐁스의 변신도 빨랐다. 그는 프랑스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 매수자를 모집했다. 런던의 사촌들에게도 연락을 취하고, 경쟁 은행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파리와 런던의 로스차일드가 움직이자 유럽의 금융가들을 모여들었다.

런던의 라이어닐은 외환시장에 개입해 프랑스 통화를 안정시키고, 프랑스 정부에 보증을 섰다. 로스차일드에 의해 유럽 금융시장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화해가 이뤄졌다. 프랑스 국민은 물론 영국 사람들도 프랑스 국채에 모여 들었다.

 

국채를 두 번 발행하면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거뜬히 조달했다. 18713월에 20억 프랑이 발행되고, 1년뒤 30억 프랑이 발행되었다. 첫 번재 발행에 489,700만 프랑이 찰했고, 두 번쩨 모집엔 무려 438억 프랑이 국채 시장에 몰렸다. 응찰자가 많았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 프랑스는 배상금을 조달할수 있었다. 물론 로스차일드의 덕분이었다. 로스차일드도 돈을 벌었다.

 

로스차일드의 성공적인 프랑스 국채 발행은 남의 집에 들어와 와인이나 뺏으려던 비스마르크에게 일격을 가한 셈이 되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2년만에 모두 갚았고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을 철수시켜야 했다.

비록 프랑스는 독일에 굴욕적인 패전을 했지만 전쟁은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채 발행에 프랑스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전쟁은 반드시 무기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배상금 상환은 로스차일드 일가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프랑스 3공화정(1870~1940)이 독일과의 강화에 불만을 품은 좌파들의 파리코뮌(Paris Commune)을 진압하고 장수할수 있었던 것은 독일에 당한 패전을 재빠르게 회복한 덕분이다. 로스차일드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아무런 도전 세력 없이 유럽 금융시장의 패권을 이어갔다.

 

알퐁스 로스차일드(1827~1905) /위키피디아
알퐁스 로스차일드(1827~1905)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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