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의 비밀⑧…세계를 품다
로스차일드의 비밀⑧…세계를 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1.2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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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따돌리고 수에즈 운하 획득…남아프리카 다이어몬드 광산도 투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이후부터 1914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30여년 동안 유럽은 상대적으로 평화를 구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각지에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기업과 금융회사들도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로스차일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1874년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디즈레일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영국이 개입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주장하면서 로스차일드가와 호흡을 맞췄다. 게다가 디즈레일리가 소설가 시절에 라이어닐 로스차일드의 부인 샬롯(Charlotte)에게서 메리 루이스(Mary Anne Lewis)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그가 총리가 되기까지 부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고 한다.

총리가 된 후 디즈레일리는 주말이면 피카딜리에 있는 라이어닐의 저택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187511월의 어느날 라이어닐이 디즈레일리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집사가 전보를 들고 왔다. 라이어닐이 파리에 파견된 아들 나타니얼로부터 온 전보였다. 내용인즉 이집트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Suez Canal) 주식 전량을 담보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대출을 받으려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투르크 영토였지만, 현지 총독이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1805년에 준독립 상태로 통치했고, 그후 후계자들이 세습통치를 이어갔다. 디즈레일리가 총리였을 때 이집트 총독은 무하마드 알리의 손자 이스마일(Isma'il Pasha)이었다.

이집트는 1869년 프랑스인 페르드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의 감독 아래 수에즈 운하를 준공했다. 영국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하가 프랑스 기술에 의해 뚫리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 운하를 가지면 유럽에서 극동까지 항해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영국 식민지인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통치하는데도 수월했다.

이집트는 운하 건설 과정에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는 바람에 빚에 허덕였다. 이집트 정부는 유럽 은행에서 돈을 빌렸는데, 고금리였다. 로스차일드는 리스크가 높다는 이유로 이집트에 대출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187511월초 이집트 재정은 파산 직전으로 몰렸다. 이스마일 총독은 자신이 보유한 운하의 지분 44%를 담보로 프랑스 정부에서 돈을 빌릴 계획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는 빚에 허덕이는 이집트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이스마일은 프랑스의 고압적 태도에 분개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미국 항공모함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미국 항공모함 /위키피디아

 

그날 저녁 디즈레일리는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했다. 총리는 가격이 얼마지라고 물었다. 라이어닐은 집사에게 가격을 알아보라고 했다. 집사는 나타니얼에게 전보를 쳤고, 곧바로 가격이 나왔다. 177천주에 1억 프랑이라고 했다. 영국 돈으로 400만 파운드였다.

디즈레일리는 라이어닐에게 돈을 준비할수 있느냐고 물었다. 라이어닐은 24시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당시 영국 의회는 휴회상태였다. 영국 정부가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에게서 그만한 돈을 얻으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의회 승인이 나더라도 영란은행 이사회를 거쳐야 하므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를 가져오는 일은 비밀을 엄수해야 함과 동시에 긴급성을 요하는 일이었다. 다음날 런던 로스차일드의 총책 라이어닐은 디즈레일리에게 400만 파운드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외무대신 더비 경이 즉시 카이로로 전보를 보냈다. 프랑스와의 협상에 지친 이스마일은 영국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이스마일은 “11월말까지 300~400만 파운드가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고 재촉했다. 만일 대출건이 늦어지면 프랑스의 보복이 예상되었다.

디즈레일리는 성미가 급한 성격이었다. 우선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고를 하고, 각의를 열어 이집트 대출건을 통과시켰다. 영국 정부와 런던 로스차일드 사이에 대출계약이 맺어졌다. 이자율 연5%, 수수료 2.5%였다. 1124일 각의는 대출건을 승인했고, 영국정부는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이집트의 빚을 갚아 주었다.

 

이스마일 이집트 총독 /위키피디아
이스마일 이집트 총독 /위키피디아

 

영국은 프랑스를 한방 먹였다. 프랑스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줄 생각을 하며 드 레셉스 회사를 통해 협상을 벌이던 중에 영국이 기습적으로 끼어들게 된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여왕에게 수에즈는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 프랑스가 작전에서 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영국은 이전에 수에즈에 대한 소액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번에 대출한 건을 더해 수에즈에 대한 운영권을 확보했다. 영국은 곧바로 수에즈 운하에 대해 자유통행권을 채택했다. 프랑스가 자국선 이외의 선박에 대해 통행을 제한하거나 높은 통행료를 물리던 관행을 바꿔 영국은 모든 나라 선박에 대해 정치적 방해를 받지 않고 동일한 통행료로 운하를 통행하도록 허용했다.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나중에 결과를 알려준 런던 로스차일드에게 감정이 상했다. 일가가 비밀을 공유하지 않은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파리 로스차일드의 총책 알퐁스는 감정을 억누르고 런던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라이어닐 로스차일드(1808~1879) /위키피디아
라이어닐 로스차일드(1808~1879) /위키피디아

 

수에즈 운하 관리권이 영국에 넘어가자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 불길이 당겨졌다. 이슬람주의 정치가들은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고 운하 관리권을 되찾자고 주장했다.

영국이 400만 파운드를 지원한 이후에도 이집트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연합해 850만 파운드의 이집트 국채를 준비했다. 이 무렵 런던 로스차일드엔 아버지 라이어닐(Lionel)이 죽고(1879) 장남 나타니얼(Nathaniel Mayer)이 경영을 맡았다.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은 민족주의를 이용해 운하 감독관을 해임하고 관리권을 다시 빼앗았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공동개입을 요청했다. 두 나라는 이집트의 상국인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에 압력을 넣어 운하관리권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술탄의 명령에 의해 1879년 이스마일이 사임하고 아들 테우피크(Tewfik Pasha)에게 총독 자리를 물려주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운하 지배권이 영국에 다시 넘어갔고, 프랑스도 운하관리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유럽 열강이 개입하면서 정권이 바뀌자 이집트엔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하고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들었다. 1881년 우라비 파샤(Urabi Pasha)가 반란을 일으켜 외국인의 생명과 운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는 양국 정부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다. 영국에선 1880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토리당이 패배하고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이 다시 집권했다. 글래드스톤은 해외 사태에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인이었고, 로스차일드가와 친밀한 관계에 있지 않았다.

로스차일드는 낙담했다. 하지만 이집트 사태가 악화하자 군대를 파견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프랑스도 질서회복을 위해 공동 출병하자고 영국에 제의했다. 글래드스톤도 마지못해 출병을 결심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출병하는 것은 꺼렸다.

18809월 영국군은 프랑스를 따돌리고 이집트에 출병해 행동을 개시했다. 프랑스는 출병할 여력이 없었지만 영국 단독 출병에 굴욕감을 느꼈다. 파리 로스차일드는 영국군이 질서를 회복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런던 로스차일드와 추진한 공동출병이 무산된 것에 대해 영국에 대해 혐오감을 더해갔다.

1882년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고 수에주 운하를 독점 운영했다.

 

로스차일드는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광산에도 눈독을 들였다.

남아프리카에선 1867년 오렌지 강과 발 강 기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유럽의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로스차일드도 남아프리카에 대리인을 두고 현지 상황을 보고받았다. 현지 대리인은 너무 많은 사업자가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회사를 합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런던 로스차일드의 나타니얼 형제들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로스차일드는 우선 앵글로 아프리칸 다이아몬드사의 대주주가 되어 1882년부터 작은 회사들을 합병해 나갔다. 또다른 유대인 바니 바르나토(Barney Barnato)도 회사 합병에 나서며 로스차일드와 경쟁했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에서 건너간 세실 로즈(Cecil Rhodes)와 손잡고 합병작업을 밀어붙였다. 이제 세실로즈와 바니나토와의 다이아몬드 전쟁이 벌어졌다.

세실 로즈는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카이로에서 케이프까지아프리카 대륙을 영국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스차일드와 손잡고 다이아몬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바르나토도 20대에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1887년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업계는 세실 로즈와 르나토의 두 회사에게 거의 흡수되었고, 프렌치 다이아몬드사라는 큰 기업 하나만 남았다. 마침 프렌치 다이아몬드의 광산에서 다이아몬드가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세실 로즈와 바르나토는 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세실 로즈는 런던으로 건너와 나타니얼에게 100만 파운드를 보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실 로즈는 그 돈을 가지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바르나토는 로스차일드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으며, 자신의 회사도 합병하라고 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세계최대 다이어몬드회사 드 비어스(De Beers).

나타니얼은 세실로즈가 설립한 남아프리카 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pany)에도 투자했다. 이 회사는 동인도회사처럼 군대를 보유하고 식민지를 확대했다. 세실로즈는 남아프리카를 장악하고 로디지아(Rhodesia)로 영토를 확장했다. 로디지아는 세실 로즈의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짐바브웨(Zimbabwe).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위키피디아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세계 각국에 자금을 지원했다.

1820년대 브라질이 포르투갈에서 독립할 때 포르투갈은 자산을 가져가는 댓가로 2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브라질은 런던 로스차일드에게 채권 발행을 부탁했고, 로스차일드는 1825년 채권을 발행해 신생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로스차일드는 일본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러일전쟁(1904~1905) 발발하자 일본은 로스차일드에게 전쟁국채 발행을 요청했다. 런던 로스차일드는 1,150만 파운드의 일본 국채를 발행해 전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로스차일드는 1824년 보험회사로 얼라이언스(Alliance Assurance)를 설립한데 이어 1873년 스페인의 세계최대 광물회사 리오 틴토(Rio Tinto)가 경영위기로 휘청거리자 인수해  경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세계를 상대로한 로스차일드의 영업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나타니얼 메이어 로스차일드(1840~1915) /위키피디아
나타니얼 메이어 로스차일드(1840~1915)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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